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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
한국사에서는 [[고려|고려 시대]]에 처음 등장하였는데, 5등작(공, 후, 백, 자, 남) 중에서 최고의 지위를 점한다. 고려 때 제후는 왕의 종친인 경우 공(公),후(侯),백(伯)에 비종친인 경우 정2품 국공(國公), 종2품 군공(郡公), 정5품 현후(縣侯), 정5품 현백(縣伯), 정5품 개국자(開國子), 종5품 현남(縣男)에 봉작 되었다. 대부분 왕자들은 공(公),후(侯)에 봉작되었으며 후(侯)에 초봉되었다가 공(公)으로 진봉되는 것이 관례였다. 국공(國公)에 봉작된 이로는 조선국공(朝鮮國公) 이자겸, 개성국공(開城國公) 왕기 등이 있다. 봉작제는 [[충렬왕]] 때에 [[원나라|원]]의 내정 간섭에 의해 체제가 격하되어 잠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공민왕]]때에 다시 부활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1398년]](태조 7년) 왕자를 공(公)으로, 종친과 부마를 후(侯)로, 정1품을 백(伯)으로 봉하기도 하였으나,<ref>[http://sillok.history.go.kr/id/kaa_10709001_005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9월 1일 계유 5번째기사]</ref> [[1401년]]에 [[조선 태종|태종]]은 중국을 참람되게 모방할 수 없다하여 공(公)을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후(侯)를 [[군 (작위)|군(君)]]으로, 백(伯)을 [[부원군|부원군(府院君)]]으로 고치게 하여 3단계 작위인 봉군제만 사용했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B%B6%80%EC%9B%90%EB%8C%80%EA%B5%B0&keyword=%EB%B6%80%EC%9B%90%EB%8C%80%EA%B5%B0 태종 1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1월 25일(을유) 4번째기사]</ref> 이후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격상되자, 대한제국 건국에 가장 큰 공로가 있는 [[심순택]]이 [[1906년]] 고종 황제로부터 공작에 봉작되어 청녕공(靑寧公)에 봉작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4302020_001 |제목=고종실록 47권, 고종 43년 2월 20일 양력 1번째기사 |확인날짜=2019-03-2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90306043952/http://sillok.history.go.kr/id/kza_14302020_001 |보존날짜=2019-03-06 |깨진링크url-status=dead }}</ref>
 
그밖에 외국으로부터 국공에 봉해진 사례도 있다. [[삼국시대]] 말, [[고구려]] 유민 지도자인 [[대중상]]이 [[중국]] [[당나라]]로부터 진국공(震國公)의 작위를 받은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