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73번째 줄:
고구려가 [[수나라|수]]·[[당나라|당]]과 혈투를 전개하는 동안, [[의자왕|의자왕]](義慈王)은 신라의 백제전선(百濟戰線)의 요지인 [[대야성]](大耶城, 현재의 [[합천]])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는 외교를 감행하였으나, 고구려가 출병의 대가로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정복하고 이어 고구려를 협공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리하여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백제를 치게 하였다. 신라는 [[김유신]](金庾信) 등으로 하여금 백제를 진공케 하니, 당군은 백강(白江) 좌안(左岸)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 대전의대전 동쪽동구와 충북 옥천 사이)을 넘어서게 되었다.
 
당시 의자왕은 교만하고 향락에 젖어 있었고, 조정은 간신들이 사리(私利)를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성충]](成忠) · [[흥수]](興水) 등 충신은 처형되었다. 백성은 거듭되는 전쟁에 지쳐 내분이 발생하고 정부로부터 이반(離叛)되어 백제는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階伯)이 5천의 결사대로 국운을 지탱하려 하였으나 대패하고,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660년]]에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