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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 중기에 험윤이 강성하였고, 초획(焦獲) 땅으로 옮겨 살았다. 험윤은 초획을 거점으로 남쪽으로 침입해 호(鎬), 삭방(朔方), 경양(涇陽)에 이르러 서주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였고, [[주 선왕]]은 대장(大將) 남중(南仲)에게 명령해 군사를 이끌고 북벌하도록 했고, 또한 삭방에 성을 쌓았다. 《[[시경]]·채미(采薇)》에서는 당시 주나라와 험윤의 전투 상황과 병사들의 고된 전투 생활을 묘사하고 있고, [[동진]]의 사현(謝玄)은 이 부분이 《[[시경]]》 중에서 가장 좋은 시편이라고 일컬었다.
 
[[춘추 시대]]에 접어들어 험윤은 융적(戎狄)으로 지칭되었고, [[전국 시대]]에는 [[진 (영성)|진나라]], [[조 (전국)|조나라]], [[연 (춘추 전국)|연나라]]의 북쪽 지역에 분포하였다. 이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고, 몽염(蒙恬)이 30만 대군으로 험윤을 패배시키자 험윤은 북쪽으로 옮겼다. 진나라 말기에는 [[고비 사막]]의 남북을 통치하여 그 세력이 남쪽으로 음산(陰山)을 넘고 황하(黃河)를 건너 [[허타오]]의 옥토를 점거하였다. [[한나라]] 때부터 험윤은 흉노의 선대 민족으로 많이 여겨졌는데, 《[[사기 (역사서)|사기]]·흉노열전(匈奴列傳)》은 "당우(唐虞) 이전에는 산융(山戎), 험윤(玁狁), 훈육(葷粥)이 있어 북만북적(北)에 거주하며 기르는 가축을 따라 옮겨 다녔다."고 적고 있다. 다만 이 부분은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夏后氏)의 먼 후예이다."라는 설명과 상충된다.
 
근대에 와서 역사학자 [[왕궈웨이]]가 귀방(鬼方), 곤이(昆夷), 험윤은 동일한 민족으로 명칭이 같지 않을 뿐이라고 여겼다.<ref>王國維,《鬼方、昆夷、玁狁考》,載於《觀堂集林》卷十三</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