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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왕조의 후반에 활동적이었으며 한군의 정규군에 참여하였다. 중국 황제의 최전선의 주요 비중국 민족들과 같이, 오환은 황실과 상대적으로 협조적이었다. 190년경 [[후한]]이 멸망할 당시 오환은 중국의 반란과 내전에 참여하였다. 200년대에 오환의 3부는 황하 이북의 중요한 군주였던 [[원소 (후한)|원소]]를 지지하였다. 207년 [[조조]]는 오환의 영토로 깊숙이 행군해 들어오고 그들을 볼랑산(白狼山之戰)에서 격파하였다. 많은 오환의 기병이 그에게 투항하고 그는 천하의 가장 위대한 기병대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비록 다양한 오환 지도자들이 3세기에 산발적인 반란을 이끌었지만 4세기에는 [[선비족|선비]]나 한족에 흡수되었다.
==습속==
말을 타고 다니며 활쏘기를 잘 하고, 물과 풀을 따라 유목 생활을 하였으므로, 거처가 일정하지 않았다. 빈약한 갈대 오두막을 집으로 삼아 입구를 모두 동향(東向)으로 하였다. 낮에 금수(禽獸)를 사냥하여 고기를 먹고 젖을 마시며, 털과 솜털로 옷을 해 입었다. 젊은이를 귀하게 여기고 늙은이를 천대하였고, 그 성품이 사납고 오만했으며, 노여우면 아비와 형을어미를 죽였으나 끝내 그 어미는형제는 해하지 아니하였으니, 어미에게는형제에게는 일가(一家)가 있으나, 아비와 형은어미는 그들의 몸으로서 종자(種子)가 될 뿐이어서, 보복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결투나 침범을 서로 다투는 것을 능히 다스리는 용맹하고 강건한 자를 추대하여 부족장(部族長)인 대인(大人)으로 선출하였고, 읍락은 각기 작은 우두머리를 가지는데, 세습하지는 않았다. 수백에서 수천개의 마을로써 일부(一部)를 이루었고, 대인이 부를 일이 있으면 나무에 새겨 신표(信標)로 삼고 읍락은 이를 전하고 행하였으니, 문자는 없어도 부(部)의 무리들이 감히 그 전달받은 바를 어기지 아니한다. 성씨(姓氏)는 일정한 것이 없고, 대인에 의하여 강건한 자의 이름 글자를 성(姓)으로 삼는다. 대인 이하(以下)는 각자 목축(牧畜)하고 생산(生産)을 다스리며, 부역(賦役)을 돕지는 않는다.
===혼인과 가정 생활===
그 결혼은 모두 먼저 중매 없이 사통(私通)하여 여자를 빼앗아 가고 나서 반년이나 백일 후에 중매인을 파견하고 말·소·양을 보내어 장가드는 것을 예법으로 삼았다. 남편은 아내를 따라 되돌아가는데, 남편은 처가(妻家) 사람들을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뵙고, 아침에 일어나 모두에게 절하였으나, 자기의 부모에게는 몸소 절하지 않았다. 처가의 머슴이 되어 이년(二年)을 사역(使役)하면, 처가는 후하게 여자를 보내는데, 거처와 재물이 오로지 처가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그 습속(習俗)은 부인(婦人)의 계책(計策)을 따르나, 전투할 때가 되면 남자는 그것을 스스로 결정한다. 부자(父子)와 남녀가 서로 마주보고 쭈그려 앉고, 모든 머리카락을 깎아서, 가볍고 편하게 한다. 부인은 시집갈 때가 되면 머리카락을 기르고 나누어 상투로 하여, 구결(句決)을 붙이고, 금과 푸른 옥으로 꾸미니, 중국에 있는 보요관(步搖冠)<ref>관(冠)의 일종으로, 걸어다니면 흔들리는 장식으로 만들어 머리에 쓰는 관(冠)을 말한다.</ref>과 같다. 아비나 형이 죽으면, 아비에게 계모가 있는 경우에는 계모를 처로 삼거나 형수를 취한다. 만약 형수를 취할 자가 없으면 자기 아들로 볼 때, 관계가 밀접한 순서〔親之次〕에 따라 조카가 백모나 숙모를 처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에 따라 처로 삼은 자가 죽으면, 그 옛 지아비와 합장(合葬)한다.([[형사취수]]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