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회빈 강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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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반청노선에 반기를 드는 소현세자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불화는 계속된다. 결국 귀국한 지 두 달 뒤인 [[4월 23일]] 인조의 어의 이형익의 시침을 받고, 3일 후 소현세자가 34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인조는 진상조사를 바라는 강빈과 대신들의 간청을 뿌리치고, 장례일을 앞당겨 입관을 서둘렀고 세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장례절차를 밟게 했다. 참관 인원도 일부 종실로 제한하고, 어의를 처벌하라는 논의 자체를 금했다.
 
=== 강빈옥사사건 ===
=== 소용 조씨과의 갈등과 법살 ===
그해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가 되었고, 강빈과 대립관계에 있던 조소용(훗날의 [[귀인 조씨 (인조)|귀인 조씨]])이 인조를 저주했다고 강빈을 무고하여 그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키자, 강빈은 인조에게 조석문안도 거부한다.
 
인조24년([[1646년]]) 음력 1월 3일 인조의 식사 중 전복구이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인조는 독살시도를 조사하는대 이때 궁녀 8명을 용의자로 구금하는데 그중에 정렬 등 강빈의 [[궁녀]]들을 5명이나 잡아들이고 강빈은 별당에 감금시키 왕의 독살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조사 과정은 궁궐의 [[내수사]]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그러던 같은달 8일 인조가 독살사건을 신하들 몰래 국문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고 신하들이 정식조사를 요구한다 처음에는 이 정식조사 요구를 반대하지만 결국 11일 오후에는 정식조사를 승인해 의금부에서 독살 사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다.<ref>{{서적 인용|url=http://worldcat.org/oclc/35104502|제목=승정원 일기.|성=承政院 (Korea)|날짜=1994-<2004>|출판사=Minjok Munhwa Ch'ujinhoe|isbn=89-7977-022-7}}</ref> 그와중에도 인조는 (독살 이후로도 큰 병세가 없는데) 갑자기 독살사건이 벌어진지 2주도 더 지난 음력 1월 18일 통증을 호소하며 이것을 독살시도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신하들을 압박했고 신하들도 관련자 궁녀들을 강력하게 고문한다. 그러나 고문당한 궁녀 7명 중 3명이나 죽어나갈 정도로 1달 동안 가혹하게 고문했지만 독살시도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ref>인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pa_12401003_004 인조 24년 1월 3일 기사]</ref>
[[1646년]] 정월 강빈 궁 소속의 궁녀들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은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당했는데, 강빈은 이 혐의로 별당에 유치되고, [[1646년]] 4월 30일(음력 3월 15일)에 사약을 내려 죽게 한다. 강빈의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 당한다.<ref>{{웹 인용
 
음력 2월 3일 결국 인조는 신하들을 전부 불러 강빈의 독살 연관을 추긍하고 신하들은 강빈의 혐의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인조는 강빈이 청나라 인질시절에 홍금적의와 내전 칭호를 쓰고 성을 자주내고 문안인사를 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왕위찬달의 의도가 있으며 때문에 독살도 강빈이 저지른 짓이라고 주장하며 강빈을 역모로 처벌할 것을 신하들에게 지시한다. 그러나 인조의 주장들은 신빙성이 부족한 주장이었고 무엇보다 이런 정황을 독살시도와 연관짓는것은 억지에 불과 했다. 신하들도 반발했지만 인조가 욕설까지 해가며 강압적으로 밀어부치고 결국 [[1646년]] 4월 30일(음력 3월 15일)에 사약을 내려 죽게 한다. 강빈의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 당한다.<ref>{{웹 인용
|url =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b_A9999_2_0004163
|제목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시스템-민회빈 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