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호아이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동일 항목 영어 위키백과 문장 추가
44번째 줄:
 
==전투==
[[Image:Tonkin marsouin.png|thumb|right|220px200px|통킹의 프랑스 해병대 보병, 1883]]
레비옹의 좌군은 흑기군 우익 전열을 성공적으로 요격하지 못했고, 그 대가로 유영복과 흑기군 대군에 의해 반격을 당했다. 탄약이 부족해지자 프랑스는 꺼우저이(紙橋)로 퇴각했다. 그들의 퇴각은 거의 궤멸로 이어졌고, 부대와 동행한 베트남인 [[쿨리]]는 공황상태로 뒤쪽으로 몰려갔으며, 탄약이 보급되는 제방로를 막았다. 그러나 봉 마을의 대피소에서 사격을 하던 슈발리에의 해병대 보병 대대는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성공적으로 엄호했으며, 방어선을 떠나 야외로 나온 흑기군 부대에 엄청난 사상자를 내게 했다. 밤이 되자 부에는 예비 병력을 보내, 레비옹이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게 했다. 다른 두 부대의 진행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부에는 당일 저녁 레비옹의 부대에게 하노이로 귀환하라고 명령했다.
 
52번째 줄:
8월 16일, 비쇼는 사주묘를 공격하여 진군했지만, 흑기군이 밤새 진지를 버리고 간 것을 발견했다. 전투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진행되었고, 8월 15일 밤, 홍강의 강둑이 무너져서 하노이와 푸호아이 사이의 평원을 범람시켰다. 그 홍수는 전투를 효과적으로 중단시켰다. 8월 16일에는 코로나도, 비쇼도 더 이상 진전할 수 없었다. 코로나의 부대는 하노이로 귀환했고, 비쇼는 사주묘를 점령하고 철수하면서 흑기군이 버린 많은 대포를 노획하여 하노이로 돌아왔다. 프랑스는 나중에 홍수로 인해 유영복에게 큰 패배를 안기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 범람은 흑기군에게도 재앙이었다. 유영복은 [[다이강]] 앞에 있었던 자신의 참호를 버리고 강 뒤로 물러나서 모든 물자와 부상병들을 남겨두고 후퇴했다.
 
푸호아이 전투에서 프랑스 사상자는 사망자 17명 (정교 2명 포함)과 부상자가 62명이었다. 프랑스군이 추정한 흑기군 사상자는 사망자 약 300명과 부상자 약 800명이라고 추정했다.<ref>Bastard, 189–97; Duboc, 162–78; Huard, 99–103; Lung Chang, 151-2; Nicolas, 264–77; Thomazi, ''Conquête'', 163–5; ''Histoire militaire'', 60–62</ref>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