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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扶餘)<ref>[http://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29388&bbsId=BBSMSTR_1008&mn=NS_01_09_01 백제 유적 세계유산 등재가 지닌 의미], 월간 문화재사랑, 문화재청, 2016년 3월 3일</ref>는 [[백제]] 왕족의 [[성씨]]다. [[온조왕]]을 시조로 하고 스스로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우리역사넷">[http://contents.history.go.kr/mobile/ht/view.do?levelId=ht_001_0040_0010_0010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즉위 조], 우리역사넷</ref>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초기 백제 왕족의 성씨를 해씨(解氏)라고 밝히고 있고, [[고이왕]]과 그의 자손인 [[책계왕]], [[분서왕]], [[계왕]] 등은 우씨(優氏)였다는 견해가 있어 백제 왕족이 전 시대에 걸쳐 부여씨를 성씨로 삼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백제의 왕위가 맏아들로 이어지게 된 것은 고이왕에서 [[근초고왕]] 사이의 어느 시기 였을 것이고, 부여씨는 백제 후기에 자칭하여 붙인 것일 수 있다. 왕이 성씨를 만들거나 바꾼 시점에서 그 선조들의 성씨와 [[휘]]도 다시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ref name="원광대학교">[http://mahan.wonkwang.ac.kr/culture/2003-3/p2.htm 백제시대 개관], 원광대학교</ref> [[온조왕]]과 [[비류]]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조금씩 다른데, 성씨 역시 해씨, 우씨 등으로 다르다. 여기서 해씨는 부여의 [[해부루왕]]을 자신의 조상으로 내세우는 주장이고, 우씨는 [[소서노]]의 첫남편 우태의 자손이라는 주장이다.<ref name="우리역사넷" /> 이는 온조와 비류가 형제 지간이 아니라 [[서울특별시|한성]]과 [[인천광역시|미추홀]]을 거점으로 한 서로 다른 세력이었음을 암시한다.<ref name="원광대학교" />
{{분류 필요}}
부여(阿莘)는 백제왕조의 성씨이다.
본관은 [[서울특별시|위례]]이다.시조는 [[온조왕]](부여온조)이다.백제가 멸망한후 한국의 성씨로는 [[부여 서씨]],[[의령 여씨]]로 이어졌다.일본의 성씨로는 '''백제왕''' 성씨로 이어졌다.
 
== 시조 ==
'''부여 서씨의 시조:[[부여융|서숭]](부여융) 의령 여씨의 시조:[[의령 여씨|여선재]] 백제왕씨의 시조:왜로 귀화한 백제인'''
《삼국사기》는 온조가 한성에 도읍하여 십제(十濟)를 세우로 자신의 성씨를 부여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는 온조의 성씨를 해씨로 기록하고 있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1543&content_id=rp070315430001&print=Y 온조왕], 문화컨텐츠닷컴</ref>
 
== 백제 시기 ==
건국 초기 백제는 여러 지방 세력들이 동맹을 맺은 연맹이었다. 십제라는 나라 이름 자체가 열개의 지방이란 의미를 지닌다. 부여씨가 왕권을 강화하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시작한 것은 근초고왕 무렵이라고 여겨진다. 나라 이름도 이 때 백제로 바꾸어 국력이 커졌음을 보여준다. 이후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한성을 잃고 남쪽으로 수도를 옮겼고 [[성왕 (백제)|성왕]]은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어 자신들이 부여의 후손임을 강조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2355 백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백제 왕족의 성씨인 부여씨는 [[당나라]] 측의 역사서엔 여씨(餘氏)로 줄여서 쓰여 있다.<ref name="한국역사연구회">한국역사연구회,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1998년, {{isbn|978-89-7278-328-5}}</ref>{{참고 쪽|302}}
 
== 관련 성씨 ==
{{참조|부여 서씨|의령 여씨}}
[[부여 서씨]]는 자신들의 시조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내세운다. 당나라에 끌려간 의자왕의 일족은 모두 그곳에서 살다 죽었는데 당나라는 부여융에게 서씨 성을 하사하고 다시 백제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학계는 이러한 주장이 서씨 족보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다른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없고, 오히려 중국 [[산시성]]에서 발굴된 의자왕의 손녀 무덤에 부여태비(扶餘太妃)라는 명칭이 붙어 있기 때문에 그 아버지인 부여융 역시 그곳에서 살다 죽었을 것으로 본다. 조선 중기까지도 부여 서씨의 족보에는 자신들이 [[이천 서씨]]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밝히고 있으나, 19세기에 들어서 스스로 부여융의 후손이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ref>[http://m.smgnews.co.kr/128920 부여서씨], 새만금일보, 2016년 5월 13일</ref>
 
귀족들 사이에서 본관과 성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고려]] 초기로 당시 만들어진 성씨 가운데에는 중국을 기원으로 두거나 삼국 시대 왕족을 기원으로 두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자기 가문이 유래가 깊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서술일 뿐 사실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ref name="한국역사연구회" />{{참고 쪽|302-303}}
 
[[의령 여씨]]는 자신들의 시조가 의자왕으로 백제 멸망 후 그 후손들이 중국에 살다가 [[송나라]] 시기에 고려에 왔다고 주장한다.<ref>[http://www.smgnews.co.kr/126704 의령여씨], 새만금일보, 2016년 3월 24일</ref> 이 역시 본관과 성을 만들 때 지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부여 서씨와 의령 여씨는 의자왕을 같은 시조로 하는 자손이라는 생각이 생겨났다.
 
== 각주 ==
{{각주}}
 
[[분류:백제]]
[[분류:성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