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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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5번 (베토벤)|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베토벤)|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베토벤)|교향곡 9번]]》, 《[[피아노 소나타 8번 (베토벤)|비창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 14번 (베토벤)|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 생애 ==
결혼하였는데, 마리아는 [[트리어 대주교령|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요한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의 딸이었다.
 
=== 유년 시절 ===
마리아는 원래 모두 7남매를 낳았다. 장남인 루트비히 마리아는 태어나자 마자 곧 죽었고 둘째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다. 셋째 카를과 넷째 요한을 낳은 후에 낳은 자녀들도 모두 일찍 죽진 않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일찍 죽게 되었다. 1787년 마리아가 죽은 후 살림을 맡아 준 가정부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부양은 베토벤의 몫이었다. 첫째 동생인 안톤 카를(Anton Karl Beethoven : 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베토벤 전기 작가인 세이어(Thayer)는 바가텔집 작품33과 가곡 작품52 등으로 추측하고 있다. 카를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12년~1773년)이었다. 할아버지 베토벤은 17살에 독일로 이주하여 쾰른 선제후 궁정의 베이스 가수로 취직해서 [[카펠마이스터|악장]](Kapellmeister)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외아들 요한 판 베토벤(Johann van Beethoven, 1740년~1792년)도 같은 곳에서 [[테너]] 가수로 일하였으며 [[피아노]]와 [[바이올린]] 교습으로 부수입을 벌었다. 요한은 1767년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와 결혼하였는데, 마리아는 [[트리어 대주교령|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요한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의 딸이었다. 마리아는 원래 모두 7남매를 낳았다. 장남인 루트비히 마리아는 태어나자 마자 곧 죽었고 둘째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다. 셋째 카를과 넷째 요한을 낳은 후에 낳은 자녀들도 모두 일찍 죽진 않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일찍 죽게 되었다. 1787년 마리아가 죽은 후 살림을 맡아 준 가정부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부양은 베토벤의 몫이었다. 첫째 동생인 안톤 카를(Anton Karl Beethoven : 1774~1815)은 형과 같이 작곡가가 되려고 했지만 일찍 포기하고 세무서원이 되었다. 피아노를 웬만큼 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재능이 없었기에 나중에 형의 평판이 높아지자 형의 작품을 처분해서 한 몫 보려는 생각으로 형이 출판을 꺼려했던 초기의 습작들을 팔아치우는 등 여러가지로 형을 괴롭혔다. 베토벤 전기 작가인 세이어(Thayer)는 바가텔집 작품33과 가곡 작품52 등으로 추측하고 있다. 카를의 아들도 삼촌인 베토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막내동생인 니콜라스 요한 역시 베토벤에게 골치아픈 존재였다. 형의 도움으로 약제사가 된 그는 상당한 돈을 모은 후 형에게 빌려주고는 그것을 미끼로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인과 결혼할 때에도 형의 반대를 꺾고 결혼한 뒤부터는 더 멀어졌다. 사업수완이 좋아서 제법 재산을 모았으나 베토벤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결코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 부모님 ====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악기에 세워놓았으며,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된다. 그러나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음악 선생으로는 판 덴 에덴(van den Eeden)의 궁정 오르간 주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가족의 친구이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리고 친척 프란츠 로반티니(Franz Rovantini)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속설에서 말하는 7살이 아닌)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7살 4개월, 즉 8살이었다. 다시말해 아들 베토벤의 재능으로 술을 사먹으며 흥청망청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