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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멸망 ===
[[후고구려]]의 궁예를 실각시킨 [[고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 결과 [[마의태자]] 등의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신라의 백성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신라]]를 [[고려]]에 귀순시켰다.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태자보다도 더 극진하게 예우하며 수도 [[서라벌]](徐羅伐)을 [[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신라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경순왕]]의 사촌 여동생인 [[신성왕후]]와도 혼인하였다. 이후 고려는 신라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삼국사기]]를 저술했던 [[고려]]의고려의 [[김부식]]은 "결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다면 그 [[종실]]은 엎어지고 그 해가 죄 없는 백성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라고 논평하며 경순왕의 귀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ref>삼국사기 권제12 신라본기 제12 경순왕 논</ref>
 
또한 [[고려 태조]]는 천년 국가였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기리기 위해 자신보다 먼저 [[경순왕]]의 어진을 제작하였고, 그 복사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어진이 되었다. <ref>http://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00602/28785354/1 '비운의 경순왕' 초상화 첫 공개, 동아일보, 2010</ref> 고려왕의 어진이 조선 [[세종]] 때 불태워지거나 땅에 묻혀버린 것과 비교하면, 신라의 귀순을 결정했던 [[경순왕]]의 [[어진]]이 [[조선시대]]까지 보전된 것은 멸망 후에도 신라 [[왕실]]은 존숭되었음을 의미한다.<ref>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17/02/75397/ 신라 경순왕, 나라를 버려 나라를 얻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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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신라의 귀순을 반대했던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경순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경순왕의 어진을 들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초식으로 연명하였다고 전해진다. 태자는 끝까지 신라에 충절을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 <ref> 《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安鼎福)</ref> <ref>《동사찬요(東史纂要)》, 오운(吳澐)</ref>
 
고려 제 8대 국왕인 [[현종]]은 신라 왕실의 외손이고, 이후 왕위를 계승한 이는 모두 [[현종]]의 자손이므로 고려 왕실의 정통성은 신라로부터 나온다.<ref>삼국사기 권제12 신라본기 제12 경순왕 논</ref>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와 달리 스스로 귀순함으로써 백성을 살렸고, [[고려]]로부터 수도와 문화가 보전되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74년 동안 신라 왕실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 통치 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