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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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축소되면서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 신라의신라에서 멸망고려로 ===
[[후고구려]]의 궁예를 실각시킨 [[고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다. 그 결과 [[마의태자]] 등의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신라의 백성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신라]]를 [[고려]]에 귀순시켰다.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태자보다도 더 극진하게 예우하며 수도 [[서라벌]](徐羅伐)을 [[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신라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경순왕]]의 사촌 여동생인 [[신성왕후]]와도 혼인하였다. 이후 고려는 신라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삼국사기]]를 저술했던 고려의 [[김부식]]은 "결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다면 그 [[종실]]은 엎어지고 그 해가 죄 없는 백성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라고 논평하며 경순왕의 귀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ref>삼국사기 권제12 신라본기 제12 경순왕 논</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