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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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피란하는 사람들이 높은 산위에 올라가 바라보면서 적선이 들어오는것을 三百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남어지는 얼마인지 기록할수 없었다. 그 큰 바다를 가득메워 바닷물이 안 보일 지경인데 우리배는 다만 十여척이라 마치 계란을 누르는 것 같을 뿐만 아니라 여러 장수들이 막 패전한 뒤에 갑자기 큰 적을 만난것처럼 기운이 죽고 혼이 빠져 모두들 달아나려고만 할 뿐이었다. 다만 공만이 받드시 죽을 뜻이 있어 바다 복판에 닻을 내리자 적에게 포위를 당하니 마치 구름과 안개 속에 파 묻힘과 같을 뿐이요.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고 공중에는 대포와 우레가 바다를 진동하였다.피란하는 이들이 서로 보고 통곡하며 "우리들이 여기 온것은 다만 통제사(統制)만 믿고 온 것인데 이제 이렇게 되니 우린 이제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하였다. {얼마 있다 다시보니 적선이 차츰 물러 나는데} 공의 탄배는 아무 탈 없이 우뚝 서 있었다.그러나 {적도 다시 패를 갈라 번차레로 싸우는데 이렇게 하기를 종일토록(했으며), 필경은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이로부터 남쪽 백성들이 공을 의지하는 마음이 더욱 더 두터워졌다.<행록-이분></b><p>
 
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이라는 문구가 없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대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난중잡록과 선묘중흥지, 그리고 해남 [[명량대첩비]]에서는 화전(火戰)임을 알게 해준다. 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에 관한 기록이 빠져있다. 따라서 난중일기는 반쪽짜리 해전 기록으로 봐야 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조선 수군이 두패로 나누어서 각기 다른 작전을 수행하였기에 발생한 문제이다. 따라서 난중잡록도 반쪽짜리 해전 기록에 해당되지만 선묘중흥지는 이것을 보충하고 있다.<ref>난중일기-이순신/해남명량대첩비-홍문관 대제학홍문관제학 김만중, 예조판서 이민서,판돈녕 부사 이정영/난중잡록-의병장 조경남/선묘중흥지(선조:1587~1607) ,2019년에 문서를 토대로 확인</ref></p>
또한 이분의 행록에도 해전 경과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찾을수 있다. 행록에는 피란민들이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해전을 살펴본 기록이 있는데 "얼마있다 다시보니 적선이 차츰 물러 가는데"라는 글귀는 난중일기의 기록처럼 조선 수군이 적선 30여척을 부수고 마다시를 참수하여 효수했을때 일본군이 뒤로 물러남을 암시한다. 그리고 통제사의 대장선이 바다 복판에 있는것을 보자 일본군은 다시 패를 갈라서 번차례로 총공격을 하게 되고 하루종일 전투를 치루었으며 결국 대패하여 퇴각함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수군과 일본군은 하루종일 싸웠는데 초반에 한차례 격돌하고 중반부터 다시 격돌하여 일본군은 크게 대패하였으므로 난중일기에 기록된 30여척(초반 전투)보다 훨씬 많은 전함을 잃은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초반전투에서 마다시가 사살되고 후반전투에서는 내도수(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사살되자 일본군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지고 말았다.<br>
[[파일:임하도해역비디오.webm|섬네일|임하도해역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