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20번째 줄:
이순신은 무상(無上,물긷는 군사)김돌손(金乭孫)을 시켜 즉시 마다시(馬多時)를 끌어올릴 것을 명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적장 마다시가 곧바로 촌참(寸斬)하자 조선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토막난 것을 본 일본 수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일본군은 히데요시에게 올린 보고에는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부상으로 사망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측 기록인 난중잡록에는 효수되었다고 하였다.)
<br><p>
<b>선묘중흥지에는 통제사가 적선 30여척을 부수고 마다시의 목을 효수하여 도발을 하자 내도수가 이끄는 일본 수군이 두패로 나누어서 통제사의 조선수군을 공격하였다고공격하고 마다시를 사살했다고 하였다. [이분]의 [행록]에도 30여척을 먼저 격파하고 마다시 사후에 일본군이 물러난후 다시 두패로 나누어서 조선 수군에 대항을 하자 크게 대패하여 도주했음을 암시하고 있다.<p></b><br>
 
좁은 목(項)을 통과하려던 일본 수군은 수로를 틀어막고 있던 조선 수군에 의해 막히면서 밀물에 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었다. 통제사 이순신은 이점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일본 수군에게 또 하나의 악재로, 정오 즈음이 되자 점차 [[조류]]및 바람이 조순수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포구에 갇힌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썰물이 시작되었기에 첨저선이었던 일본 수군은 수심이 낮은 임하도 안쪽 해역에서 좌초되기 시작했다. 배를 돌려서 탈출하려 해도 좁은 해역에 많은 수의 전선이 밀집되어 있었기에 일종의 아비규환이 되었다.
126번째 줄:
<p>
*<b>"....적은 우리 군사가 외롭고 약한 것을 보고 거저 삼킬 듯이 여겨 서로 앞을 다투어 사면으로 에워싸므로 우리 군사는 거짓 포위망 속으로 들어가니 적은 우리 군사가 겁내는 것을 기뻐하였다. 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를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鼗鼓)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 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먼저 내도수(來島守)의 목을 베어 머리를 장대 끝에 달자 병사들이 용기를 내어 도망가는 자를 쫓아 수百여 놈을 베어 죽였다. 도망간 배는 겨우 十여 척이었고 우리 배는 다 탈이 없었다.<난중잡록>"<ref>난중잡록-의병장 조경남(1570~1641)</ref></b><p>
*來島守 乃悉兵前進 舳艫亘海 不知其際 而舜臣所領才十餘艘 舜臣領避亂餘船 列遙海爲疑兵 而中流下碇以當當之 賊先以百餘艟擁之 勢若風兩兩 諸將凶懼失色 謂舜臣不可復免 一時退散 舜臣親立船頭 厲聲督之 僉使金應誠 <b>//巨濟府使安衛等 回船以入 直撞其鋒 賊蟻附衛船幾陷 舜臣回船救之 立碎其兩船 頃刻之間 連破三十艘 斬其先鋒 賊大駭而却 舜臣懸賊船首 張樂船上以挑之 賊奮怒 分軍迭出 舜臣乘勝縱火 延爇諸船 赤焔漲海 賊兵燒溺死者 不知其數 遂殺來島守 毛利民部 落水僅免 其餘將帥 死者數人//</b></br>
*<b>"*거제현령 [[안위]]등이 배를 돌려 들어서서 적을 대항하자 적이 개미떼처럼 붙어 안위의 배가 거의 침몰하게 되므로 이순신이 배를 돌려 그것을 구원하고 그 자리에서 적선 두 척을 쳐부수고 잠시 동안에 삼십 척을 연달아 깨뜨리며 그 선봉장의 목을 베니 적이 크게 놀라 물러갔다. 이순신이 적의 머리를 달아매고 배 위에서 풍악을 치며 도전하니 적이 분노하여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나오는데 이순신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불을 놓아 여러 배들을 불태우니 시뻘건 불길이 바다를 덮은 속에서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적병이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며 마침내 래도수내도수(구르시마 미치후사)를 죽이고 모리민부는 물에 떨어져서 죽음을 겨우 면했고 그 밖에도 적장의 죽은자가 몇 명 있었다.<선묘중흥지>"</b><ref>선묘중흥지,(선조)1587~1607>,작자미상</ref><br><p>
*<b>是日, 避亂人士登高峯見之, 則賊船來者, 只計其三百, 而餘不可盡記, 彌滿大海, 海不見水, 我舟只十餘, 不啻若壓卵, 而諸將於新喪之餘, 忽遇大賊, 心死魄奪, 皆欲退遁, 獨公有必死之志, 中流下碇, 爲賊所圍, 如雲埋霧合, 但見白刃飜空, 砲雷震海, 避亂人等, 相與痛哭曰, 我等之來, 只恃統制, 而今若此, 我將何歸, 俄見賊船稍退, 公所乘船, 兀立無恙, 賊分軍迭戰, 如是者終日, 賊大敗而走, 自是南民之倚公尤篤,<행록-이분><br>
**그날 피란하는 사람들이 높은 산위에 올라가 바라보면서 적선이 들어오는것을 三百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남어지는 얼마인지 기록할수 없었다. 그 큰 바다를 가득메워 바닷물이 안 보일 지경인데 우리배는 다만 十여척이라 마치 계란을 누르는 것 같을 뿐만 아니라 여러 장수들이 막 패전한 뒤에 갑자기 큰 적을 만난것처럼 기운이 죽고 혼이 빠져 모두들 달아나려고만 할 뿐이었다. 다만 공만이 받드시 죽을 뜻이 있어 바다 복판에 닻을 내리자 적에게 포위를 당하니 마치 구름과 안개 속에 파 묻힘과 같을 뿐이요.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고 공중에는 대포와 우레가 바다를 진동하였다.피란하는 이들이 서로 보고 통곡하며 "우리들이 여기 온것은 다만 통제사(統制)만 믿고 온 것인데 이제 이렇게 되니 우린 이제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하였다. {얼마 있다 다시보니 적선이 차츰 물러 나는데} 공의 탄배는 아무 탈 없이 우뚝 서 있었다.그러나 {적도 다시 패를 갈라 번차레로 싸우는데 이렇게 하기를 종일토록(했으며), 필경은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이로부터 남쪽 백성들이 공을 의지하는 마음이 더욱 더 두터워졌다.<행록-이분></b><p>
 
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이라는 문구가 없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대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난중잡록과 선묘중흥지, 그리고 해남 [[명량대첩비]]에서는 화전(火戰)임을 알게 해준다. 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에 관한 기록이 빠져있다. 따라서 난중일기는 반쪽짜리 해전 기록으로 봐야 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조선 수군이 두패로 나누어서 각기 다른 작전을 수행하였기에 발생한 문제이다. 따라서 난중잡록도 반쪽짜리 해전 기록에 해당되지만 선묘중흥지는 이것을 보충하고 있다.<ref>난중일기-이순신/해남명량대첩비-홍문관제학 김만중, 예조판서 이민서,판돈녕 부사 이정영/난중잡록-의병장 조경남/선묘중흥지(선조:1587~1607) ,2019년에 문서를 토대로 확인</ref></p>
또한 이분의 행록에도 해전 경과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찾을수 있다. 행록에는 피란민들이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해전을 살펴본 기록이 있는데 "얼마있다 다시보니 적선이 차츰 물러 가는데"라는 글귀는 난중일기의 기록처럼 조선 수군이 적선 30여척을 부수고 마다시를 참수하여 효수했을때 일본군이 뒤로 물러남을 암시한다. 그리고 통제사의 대장선이 바다 복판에 있는것을 보자 일본군은 다시 패를 갈라서 번차례로 총공격을 하게 되고 하루종일 전투를 치루었으며 결국 대패하여 퇴각함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수군과 일본군은 하루종일 싸웠는데 초반에 한차례 격돌하고 중반부터 다시 격돌하여 일본군은 크게 대패하였으므로 난중일기에 기록된 30여척(초반 전투)보다 훨씬 많은 전함을 잃은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초반전투에서 마다시가 사살되고 후반전투에서는 내도수(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사살되자 일본군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지고 말았다.<br>
[[파일:임하도해역비디오.webm|섬네일|임하도해역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