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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관묵'''(白寬默, [[1804년]] ~ [[1866년]]) [[조선]] 후기의 학자다. 자 사원(士源). 호 원재(源齊). 본관은 [[태인 백씨|태인]](泰仁)이다.
 
== 생애 ==
의주(義州)에 대대로 세거해온 무관 집안 출신으로 윤구백윤구(潤九)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위원군수(渭原郡守) 첨추(僉樞) 아이진첨사(阿耳鎭僉使)를 지낸 [[백선엽]](璇燁)의 7세손이고 행곽산군수(行郭山郡守)를 지낸 [[백시겸]](白時謙)의 6세손이자 토성첨사(兔城僉使)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지낸 [[백세원]](白世元)의 5세손이다. 백관묵은 7대째 장손임에도 무관의 가풍을 받지 않고 학문에 뜻이 있었다. 집안에 아들이 귀해 동생이 종조부에게종숙부(종조부의 아들)에게 양자로 갔고, 그 동생에게 둘째 아들을 다시 양자로 보냈다.
 
백관묵은기해년([[1839년]])에 [[향공시]](鄕貢試)에 입격하고, 1840년(경자년) 식년시에 생원 등제하였다. 그는 차라리 벼슬하기보다는 산하에 별채를 짓고 은거하면서 주로 도학이나 사서류를 탐독하고 연구하여 서가에 서적을 가득히 소장하였다 한다. [[한단고기|환단고기]](桓檀古記)의 원저자인 [[계연수]]에게 [[원동중]]의 『삼성기』(三聖紀)를 전했다고 하는 '태천 백진사'(泰川 白進士) 당사자이기도 하다. 실제로 거주한 곳은 태천이 아니고 의주다.<ref>1895년 기준으로 의주부 태천군이다.</ref>
기해년([[1839년]])에 [[향공시]](鄕貢試)에 입격하고, 1840년(경자년) 식년시에 생원 등제하였다.
백관묵은 벼슬하기보다는 산하에 별채를 짓고 은거하면서 주로 도학이나 사서류를 탐독하고 연구하여 서가에 서적을 가득히 소장하였다 한다. [[한단고기|환단고기]](桓檀古記)의 원저자인 [[계연수]]에게 [[원동중]]의 『삼성기』(三聖紀)를 전했다고 하는 '태천 백진사'(泰川 白進士) 당사자이기도 하다. 실제로 거주한 곳은 태천이 아니고 의주다.<ref>1895년 기준으로 의주부 태천군이다.</ref>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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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866년 죽음]]
[[분류:조선의 학자]]
[[분류:백씨]]
[[분류:태인 백씨]]
[[분류:의주군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