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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북베트남은 공식적으로 남부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남 베트남에서도 고 딘 디엠 정권에 대한 게릴라(베트콩)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게릴라 활동과 동시에 호찌민은 [[남베트남]]에 대해 협상을 제의하였다. 이미 [[프랑스]]가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에서 철수했지만, 당시 프랑스와 일본에 이어 베트남에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제네바 협정에 서명하는 대신 남부 베트남에 친미적인 정권인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 적극적인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베트남 공화국 정부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정해진 통일 선거를 보이콧하면서 반대파에 가혹한 탄압을 가하자,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독재 정치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어 [[1960년]] 12월 캄보디아 국경 근처 마을인 탄랍이라는 곳에서《[[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 결성되었다. 해방전선은 [[베트남 노동당]]의 지원 아래 부패한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에 맞서 격렬한 싸움을 시작했다.
 
응오딘지엠의 불교도 탄압 정책은 1963년 고승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을 시작으로 점차 민심을 잃게 만들었고, 이는 결국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 내부의 쿠데타를 발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응오딘지엠을 축출하기 위해 시작된 쿠데타는 그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남베트남의 정치적 불안정과 계속되는 해방전선의 투쟁에 베트남이 공산화가 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1964년]] [[8월 2일]]에 발생한 [[통킹 만 사건]]을 일으켜 북베트남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1964년 10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근처에 있는 비엔호아 미군 비행장이 공격 받고, 1965년 2월 플레이쿠에 있던 미군기지가 공격받자, 미국은 [[1965년]] [[2월 7일]]'롤링썬더 작전'이라는 이름아래 북베트남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개시하며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고, 그해 3월에는 다낭에 지상병을 상륙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지상군을 파병한다. 전쟁 내내 미군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군에 비해 우세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 남베트남 정부의 독재와 부패로 베트남 공화국의 정치적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바탕으로 해방민족전선은 주요 도시와 간선도로를 제외한 농촌 지대를 거의 완전하게 그 세력하에 두어 베트남 공화국군과 베트남에 주둔해 있는 미군과 한국군, 호주군, 태국군, 필리핀군, 뉴질랜드군, 등에 대해 공격을 지시, 일제히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1966년]] [[7월 17일]] 호치민은 북베트남인에게 베트남 인민의 가슴에 독립과 해방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한편으로 [[미국]]과의 협상을 계속 진행해왔는데, [[1967년]] [[2월 15일]]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받고 그는 우리는 폭격의 위협 아래서는 절대로 협상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편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 지원, 특히 케싼 전투와 [[1968년]] 구정 공세를 계기로 사실상 미군이 전쟁에서 주도권을 잃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의 지지도는 급감했고 결국 닉슨에게 후임을 내주었다. 이어서 [[1969년]] 제37대 대통령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본격적으로 협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