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공: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Intershark (토론 | 기여) 잔글편집 요약 없음 |
|||
7번째 줄:
== 생애 ==
그의 아버지인 [[정지룡]](鄭芝龍)은 1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의 상선을 타고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sfn|고미|page=243}}당시 [[타이완 섬]]을 비롯한 5도 열도 지역은 [[왜구]]의 소굴이었다.{{sfn|고미|page=243}} 정지룡이 일본에 체류할 때 [[히라도 시|히라도]]에서 [[마쓰라 씨]]의 하급 가신인 [[다가와 시치자에몬]] (田川七左衛門)의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이듬해 [[난징 시|난징]]이 함락되자 정지룡 가족은 푸저우에서 명의 황손인 [[융무제|당왕]](율건)을 황제로 옹립하고 복명 운동을 전개했다.{{sfn|고미|page=244}} 이와 함께 [[1647년]]에는 [[에도 막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정지룡은 복명 운동을 포기하고 [[청나라]]와 내통하여 푸저우는 결국 청나라에 의해 함락되고, 융무제는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였다.{{sfn|고미|page=244}} 하지만 정성공은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청에 저항하는 길을 택하였고, 1648년에 다시 에도 막부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1650년 정성공은 [[샤먼 섬]]과 [[진먼 섬]]을 근거지로 삼았고, [[푸젠 성|취안저우]]·[[광둥 성|광둥]]·[[저장 성|저장]] 등 세 성 지역의 연해를 계속 공격하였다.{{sfn|고미|page=244}} 그러면서도 에도 막부, [[류큐 왕국]], [[타이완]], [[베트남]] (안남·교지), [[타이|시암]], [[필리핀|루손]] 등을 연결하는 남해 무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수입을 유지하였다. 청나라는 정성공에 대해 처음에는 회유적인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1655년 이후 결국 해안 주민들을 내륙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zh:海禁|해금]] 정책으로 바다를 봉쇄하였다.{{sfn|고미|page=24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