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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전시(殿試) 병과에 급제하면서 관직에 올랐다. [[대한제국]] 비서원에서 비서원랑과 비서원승을 지냈으며 [[홍문관]] 시독(侍讀)과 태의원 소경(太醫院 小卿), 경상남도 울산군수, [[규장각]] 부제학, 봉상사 제조(奉常司 提調), 종묘서 제조(宗廟署 提調), 의효전 제조(懿孝殿提調)을 역임했다. [[1908년]]부터 [[1909년]]까지 《[[국조보감]](國朝寶鑑)》 찬집위원(纂集委員)과 선사위원(繕寫委員), 감인위원(監印委員)을 역임했고 [[1909년]] 10월 《국조보감》 찬집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4등 태극장을 수여받았다.
 
[[1912년]] 8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 병합 기념장을 받았고 [[1914년]] [[6월 10일]] 일본 정부로부터 종5위에 서위되었다. [[1918년]] [[1월 10일]] 자신의 아버지였던 김학진이 받은 남작 작위를 승계받았고 [[1922년]] [[3월 30일]] 종4위에 서위되었다.<ref>일본 《관보》 1922년 3월 31일자</ref> [[1928년]] [[11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사과 촉탁으로 재직했으며 [[1938년]] [[9월 10일]] 조선총후보국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역임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수작/습작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각주 ==
<references />
 
== 참고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