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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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임기간 ===
그라시아누스는 그레고리오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그러나 [[베드로 다미아노|성 베드로 다미아노]]와 같이 엄격한 인물들로부터 크게 환영과 지지를 받았음에도 교회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한편 베네딕토 9세가 교황직을 팔고 로마를 떠날때, 교황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사비나]]의 주교 요한으로, 1044년 로마귀족들이 베네딕토 9세를 로마에서 축출한뒤 [[교황 실베스테르 3세]]로 옹립했던 인물이다. 실베스테르 3세는 1045년 베네딕토 9세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오면서 내쫓기며 사비나로 물러나 있었다. 그렇지만 실베스테르 3세는 자신이 정당한 교황이라는 주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정치적 동맹을 통해 로마에 다시 들어가 복위하기 위한 궁리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베네딕토 9세로 인해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결혼하기 위해 교황직을 중도 사임한 그는 곧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고 로마로 돌아와서 다시 자신이 교황이 되겠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더해, 그레고리오 6세는설상가상으로 교회 재정은 점차 바닥을 드러냈고, 적지 않은 성직자에게서 목자다운 능력이나 품성을 찾아볼 수 없었던 당시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하고는마주한 그레고리오 6세는 고뇌에 가득 찼다. 그렇지만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되는 힐데브란트 신부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올바로 쇄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서신과 교회회의라는 수단을 통해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으려 애썼으며, 정치 사회 면에서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질서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와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던 경쟁 파벌들의 세력은 너무나 막강해 쉽게 굴복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었다.
뿐만 아니라 베네딕토 9세로 인해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결혼하기 위해 교황직을 중도 사임한 그는 곧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고 다시 자신이 교황이 되겠다고 주장하면서 로마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결국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중재 외에는 당시 교회가 직면한 여러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고없다는 인식한결론에 수많은이르렀다. 고위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그레고리오 6세나 그와 경쟁 관계에 놓인 실베스테르 3세와 베네딕토 9세와의 친교를 단절하고, 당시대표단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 [[하인리히 3세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3세]]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인리히 3세는황제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1046년 가을 이탈리아로 내려갔다향했다.
여기에 더해, 그레고리오 6세는 교회 재정은 점차 바닥을 드러냈고, 적지 않은 성직자에게서 목자다운 능력이나 품성을 찾아볼 수 없었던 당시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하고는 고뇌에 가득 찼다. 그렇지만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되는 힐데브란트 신부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올바로 쇄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서신과 교회회의라는 수단을 통해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으려 애썼으며, 정치 사회 면에서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질서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와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던 경쟁 파벌들의 세력은 너무나 막강해 쉽게 굴복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었다.
 
자신의 결백을 강하게 확신한 그레고리오 6세는 하인리히 3세를 만나러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는 하인리히 3세로부터 교황으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의 요청에 따라 [[수트리]]에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그의이때 경쟁자실베스테르 중에는3세 실베스테르 3세만이역시 교회회의에 참석했다. 1046년에 소집된 수트리 교회회의는 그레고리오 6세와 베네딕토 9세, 실베스테르 3세 세 명의 교황직교회회의에서 주장을3명을 모두 폐기한다는폐위하기로 결정을결정 내렸다하였다. 실베스테르 3세는 처음부터 교황좌를 강탈한 자로 간주되어, 성직품 자체를 박탈당하고 여생을 수도원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중재 외에는 당시 교회가 직면한 여러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고 인식한 수많은 고위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그레고리오 6세나 그와 경쟁 관계에 놓인 실베스테르 3세와 베네딕토 9세와의 친교를 단절하고, 당시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 [[하인리히 3세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3세]]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하인리히 3세는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1046년 가을 이탈리아로 내려갔다.
 
자신의 결백을 강하게 확신한 그레고리오 6세는 하인리히 3세를 만나러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는 하인리히 3세로부터 교황으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의 요청에 따라 [[수트리]]에 교회회의를 소집했다. 그의 경쟁자 중에는 실베스테르 3세만이 교회회의에 참석했다. 1046년에 소집된 수트리 교회회의는 그레고리오 6세와 베네딕토 9세, 실베스테르 3세 세 명의 교황직 주장을 모두 폐기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실베스테르 3세는 처음부터 교황좌를 강탈한 자로 간주되어, 성직품 자체를 박탈당하고 여생을 수도원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6세는 교황직을 매수했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 자신도 그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그러한 행동이 성직매매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교회회의의 주교들은 그레고리오 6세에게 그와 같은 행위는 사실상 성직매매라는 것을 이해시키며, 그에게 교황직 사임을 요구하였다. 그레고리오 6세는 자신에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교회회의의 요청에 따라 스스로 교황직을 내려놓았다. 그레고리오 6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된 이는 독일인이며 [[밤베르크]]의 주교인 수이드거로, 그는 자신의 새 이름을 [[교황 클레멘스 2세]]로 명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