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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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인조 때 편찬) 광해군 9년(1617) 11월 25일조 인목대비 폐비 문제에 관하여 손문욱이 동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인목대비]] 폐비는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으로 그에 연루된 인사들은 숙청되고, 동조한 인사들은 멸문되었다. 손문욱은 항왜 출신이라는 등 출신 성분이 불분명한 인물이었기에 더욱 가혹하게 역사에서 공적이 삭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하여 인조반정 이후에 편찬된 선조수정실록 등에는 손문욱 대신 이완으로 바뀌었으며, 이후 기록에서도 이를 정설로 받아들여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인조반정 이전에 작성된 기록에서 손문욱은 탄환을 맞고 사망한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지휘했다고 기록한 점,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에 “절충장군(折衝將軍) 손문욱은 2등공신으로 책록되었다.”고 기록된 점으로부터, 손문욱은 정유재란 시기 활동으로 공적이 전쟁 이후 조선조정으로부터 인정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광해군 시기 손문욱이 인목대비 폐비에 찬성하였고, 반정 이후 인조가 즉위하면서 폐비론에 찬성한 인물들이 숙청되는 가운데 손문욱도 숙청되면서 그의 공적도 삭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인조 시기에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에도 적용되었는데, 특히 선조수정실록 편찬자의 한 명인 이식은 이순신과 같은 덕수 이씨였기에, 동족인 이순신이 손문욱에 연루되지 않도록 손문욱 공훈기사를 선조수정실록에 모두 누락시킨 것으로 보인다. 손문욱 관련기사 수를 살펴봐도, 선조실록에는 ‘이문욱’으로 5건, ‘손문욱’으로 40건이 검색되지만,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손문욱’으로만 단 1건 검색될 뿐이다.
 
== 이후의 공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