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 스미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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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 스미스'''({{llang|en|Alfred Emanuel Smith, Jr.}}, [[1873년 12월 30일]] ~ [[1944년]] [[10월 4일]])은 [[미국]]의 정치인이다.
 
[[뉴욕 주]] [[뉴욕 시|뉴욕]]의 [[맨해튼]]에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후 학업을 중단하고 뉴욕 시내의 [[풀턴 수산시장]]에서 일했다. 젊은 시절 뉴욕 시내의 [[민주당 (미국)|민주당]] 정치조직인 [[태머니 홀]]에 관계한 것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 [[1903년]] 뉴욕 주의회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주 하원의원으로 일하며 열정적인 태도와 능력을 인정받아 하원 대변인으로도 활동하며 주에서 영향력을 넓혔다. [[1916년]]에는 [[맨해튼|뉴욕 군]](맨해튼을 구성하는 행정구역)에서 일했고, [[1918년]] 뉴욕 주지사 선거에 출마, 당선되어 [[1919년]]부터 주지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1920년]]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에후보에게 패해 [[1921년]] 주지사 자리를 내놓았다. [[1922년]] 주지사 선거에서 다시 당선, [[1923년]]부터 재임했으며, 폭넓은 공공시설 투자와 사회복지에 대한 정책으로 유명해졌다.
 
미국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지게 된 그는 [[미국의 대통령|대통령]] 선거에도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1924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으나, [[금주법]]과 관련된 논란으로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지 못했다. [[1928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양대 정당 대통령 후보로는 처음으로 가톨릭 신자로 지명된 인물이다. 뉴욕의 보도(The Sidewalks of New York)라는 선거 주제가를 내세우고 독특한 복장과 연설로 큰 인기를 모았으나, 가톨릭 신자로 금주법 논란과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에 대한 논란으로 가톨릭 신자라는 벽을 넘지 못했다. [[공화당 (미국)|공화당]] 공세 속에 결국 선거에서 [[허버트 후버]]에게 큰 차이로 패했다.
 
대통령 선거 후 [[대공황]] 속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건설, 관리하는 회사의 회장으로 일했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931년]] 완성되었다. 그 후 [[1932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도전하였다. 민주당에서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그의 후임 주지사로 선출되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전현직 뉴욕 주지사인 스미스와 루스벨트는 예비선거에서 상대를 공격하며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나, [[존 낸스 가너]]가 루스벨트를 지원하면서 남부지방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동시에 부통령 지명권을 따내며 스미스는 배제되었다. 스미스는 후에 루스벨트를 공공연하게 비난했으며, 자신의 뒤를 이어 주지사직에 올랐다가 대통령 지명을후보가 따낸 후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시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과 [[194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공화당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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