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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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인용문3|right|
이 때에 왜적의 기세가 날로 성해지자 명나라가 깊이 걱정하였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 이 비밀히 '''심유경'''(沈惟敬)을 파견하였는데, 경영첨주유격(京營添住遊擊)이라고 가칭하고서 적정(賊情)을 탐지한다고 핑계하였다. 그러나 실지는 왜적의 군영으로 들어가 왜적과 상견하여 왜적을 꾀어 강화(講和)하려고 한 것이다. 유경이 그 추종(騶從)을 간편하게 하고서 빨리 달려 강을 건너왔는데 언어가 장황하였다. 이날 [[의주]]에서 유숙하니 직제학 [[오억령]](吳億齡)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유경이 억령에게,
 
"내가 왜적의 내부로 들어가 의리로써 그들을 꾸짖기를 '조선 은조선은 예의지방(禮義之邦)으로서 본시 죄과가 없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감히 명분도 없이 병사를 출동시켜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죄 없는 백성들을 살륙하는가.' 할 것이다. 왜적이 만약 듣지 않으면 또 '조선은 중국과 순치(脣齒)와 같은 나라이므로 너희들이 만약 철병하지 않으면 비단 [[산동]](山東)의 병사들만 다 출동시킬 뿐 아니라 천하의 병사들을 다 징발하여 너희들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여 기어이 물리치겠다.'고 하겠다."
 
하였다. 그 사람은 모습은 보잘것없었으나보잘 것 없었으나 말은 잘하니 대체로 변사(辯士)였다. 그리고 [[평의지]](平義智) · [[평수길]](平秀吉)과도 서로 안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7권, 25년([[1592년]]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9일(정사) 6번째 기사|<ref>{{웹 인용|제목=조선왕조실록|url=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6029_006|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확인날짜=2018년 2월 1일|보존url=http://archive.is/11CEc|보존날짜=2018년 2월 1일}}</ref>}}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일본의 기세가 드세자,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비밀리에 파견한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의 [[유격장군]]을 가칭하고, 적정을 탐지한다는 핑계로 [[조선]]에 파견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a_12506029_006&grp=&aid=&sid=3357728&pos=0 왜적의 기세가 강해지자 중국은 심유경을 파견하여 강화를 꾀하다], 선조실록 27권, 1592년 6월 29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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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 감합인(合印)<ref>무역증인(貿易證印)</ref>을 복구할 것
# 조선 팔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 조선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