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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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백제 전지왕<br/>百濟 腆支王
|본명 = [[부여영]](扶餘映)
|다른 이름 = [[부여영|부여전]](扶餘腆)
|그림 =
|그림 크기 =
|대관식 = 전지왕(腆支王)
|별명 = ?
|출생일 = [[생년 미상]]?
|출생지 = ?
|사망일 = [[420년]]
14번째 줄:
|매장지 =
|자녀 = ?
|부왕 = [[아신왕]](阿莘王)
|모후 = ?
|왕비 = ?
|전임자 = [[아신왕]](阿莘王)
|후임자 = [[구이신왕]](久尒辛王)
|묘호 = 전지왕(腆支王)없음
|시호 = 전지(腆支)
|종교 =
|가문 = 부여씨(扶餘氏)
|왕조 = 백제(百濟)
|연호 =
|목록=[[백제의 역대 국왕|백제의 18대 국왕]]
}}
'''전지왕'''(腆支王, ? ~ [[420년]], 재위: [[405년]]~[[420년]])은 [[백제]]의 제18대 [[군주|국왕]]이다국왕이다. 휘는 영(映) 또는, 전(腆) 또는 여영(餘映, 余映)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직지왕(直支王),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진지왕(眞支王), 또 《한원》에 인용되는 《송서》, 《통전》에서는 부여전(夫餘腆)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신왕]]의 맏아들이다.
 
[[일본]]에왜에 있던 중 [[405년]] 아버지인 [[아신왕]](阿莘王)이아신왕이 붕어하자사망하자 첫째 숙부 [[부여훈해]](扶餘訓解)가 임시 [[섭정]]을섭정을 맡았으나 막내 숙부 [[부여설례]](扶餘碟禮)[[부여훈해]](扶餘訓解)을부여훈해을 시해하고 후임 임시 [[섭정]]을섭정을 맡고 있었는데 [[해충 (백제)|해충]](解忠)이 [[부여설례]](扶餘碟禮)를 몰아내어 주살한 후 백제에 도착한 전지왕이 16세에 보위에 오르자 [[405년]]부터 [[408년]]까지 [[해충해충이 (백제)|해충]](解忠)이 [[섭정]]을섭정을 맡았고 [[408년]]부터 [[420년]]까지 천정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아신왕]]이아신왕이 죽자 학자 [[아직기]]가 일본에서왜에서 귀국하여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어 [[아직기]]가아직기가 전지왕이라는 학설도 존재한다.<ref>[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3580 네이버캐스트 - 왕인].</ref>
== 생애 ==
《[[삼국사기]]》 의 [[아신왕]], 전지왕 본기에 의하면 [[394년]]([[아신왕]] 3년)에 [[태자]]에태자에 책봉되었고, [[아신왕]]이아신왕이 죽고 [[아신왕]]의그의 첫째동생첫째 동생 [[부여훈해]]가 [[섭정]]을섭정을 맡고 있었는데 [[백제]] 왕실에서 내분이 일어났다고 한다. [[일본]]에서왜에서 귀국하는 도중에 전지왕은 신하 [[해충 (백제)|해충]](解忠)에게서 [[백제]]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을 알고 섬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 뒤 해씨 세력은 [[백제]]에서 [[섭정]] [[부여훈해]]를부여훈해를 시해하고 후임 [[섭정]]을섭정을 사칭하여 내분을 일으킨 [[부여설례]]([[아신왕]]의 막내아우)를부여설례를 죽이면서 전지왕을 즉위시키고, 그 이후에 전지왕이 [[백제]]에백제에 들어온 것으로 파악된다.
 
이복 동생인 부여신 등 다른 형제들이 몇 명 더 존재하였다.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 의하면 그는 [[아신왕]] 재위 중 일본에 보내졌다 한다. [[일본서기]] 제10권 오진 천황조에 의하면, "[[405년]] [[9월]] 아화왕([[아신왕]])이 서거하다. 일왕이 직지(전지) 왕자를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백제]]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라."고 하였다.<ref>손해일, 《왕인의 달》 (한국문학도서관, 1997) 102페이지</ref>" 한다. 그는 오오진 일왕이 내준 왜의 군사들을 대동하고 귀국, 설례 일파를 제거하고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이 부분이 [[아직기]]가 전지왕이라는 근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