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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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의 아신왕, 전지왕 본기에 의하면 [[394년]]([[아신왕]] 3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아신왕이 죽고 그의 첫째 동생 [[부여훈해]]가 섭정을 맡고 있었는데 왕실에서 내분이 일어났다고 한다. 왜에서 귀국하는 도중에 전지왕은 신하 [[해충 (백제)|해충]](解忠)에게서 내분이 일어난 것을 알고 섬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 뒤 해씨 세력은 부여훈해를 시해하고 후임 섭정을 사칭하여 내분을 일으킨 부여설례를 죽이면서 전지왕을 즉위시키고, 그 이후에 전지왕이 백제에 들어온 것으로 파악된다.
 
이복 동생인 부여신 등 다른 형제들이 몇 명 더 존재하였다.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 의하면 그는 [[아신왕]] 재위 중 일본에 보내졌다 한다. [[일본서기]] 제10권 오진 천황조에 의하면, "[[405년]] [[9월]] 아화왕([[아신왕]])이 서거하다. 일왕이 직지(전지) 왕자를 불러 이르기를 "그대는 [[백제]]로백제로 돌아가 왕위를 계승하라."고 하였다.<ref>손해일, 《왕인의 달》 (한국문학도서관, 1997) 102페이지</ref>" 한다. 그는 오오진 일왕이 내준 왜의 군사들을 대동하고 귀국, 설례 일파를 제거하고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이 부분이 [[아직기]]가 전지왕이라는 근거이기도 하다.
 
전지왕은 즉위하고 나서 자신에게 도움을 준 [[해충 (백제)|해충]]을 [[섭정]]으로섭정으로 임명했고 1년 후인 [[406년]](전지왕 2) [[섭정]] [[해충 (백제)|해충]]을해충을 [[달솔]](達率)로 임명했으며, [[한성]]의 벼 1천 석을 하사했고 [[408년]]부터 친정 체제를 시작하였다.
 
또한 이듬해인 [[407년]](전지왕 3)에는 이복동생인 [[부여신]](扶餘信)을 내신좌평(內臣佐平)에 임명하는 한편, 해씨 가문의 [[해수 (백제)|해수]](解須)와 [[해구 (백제)|해구]](解丘)를 각각 내법좌평(內法佐平),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하였다.
 
[[408년]](전지왕 4), [[부여신]]에게 새로운 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겸하게 하여 해씨 세력을 견제하도록 했다.<ref>《[[삼국사기]]》에 [[상좌평]]에 대한 기록이 이 때 처음 나타난다.</ref> [[417년]](전지왕 13) 7월에는 동부와 북부 2부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구성]](沙口城)을 쌓게 하고 병관좌평인 해구를 시켜 이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420년]](전지왕 16) 3월에 향년 31세로 죽었고, 아들 [[구이신왕]]이구이신왕이 즉위하였다.
 
{{출처|날짜=2015-12-19|《[[일본서기]]》에는 [[아신왕]]이 죽자 직지왕(直支王)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어 [[아직기]]가 전지왕이라는 학설도 존재한다.}}
 
== 외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