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전제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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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규모 관개사업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도 전제적 노예제가 등장하며, 또한, 대규모 관개사업이 활발한 곳에서 봉건제가 형성되기도 한다. 즉, 예외 상황이 너무 많다.
# 카를 비트포겐은 전근대 동양 사회에서 토지는 국가의 소유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지역 귀족 및 지방 세력의 통제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동양 사회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인민 다수는 귀족 세력에게 노동력 제공 및 공납을 행하는 형태로 종속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송나라(宋朝)부터 귀족이 유명무실한 작위가 되었고, 중앙관료는 지역성을 대표하는 관료 또는 귀족이 아닌, 왕권에 완전히 소속된 관료에 해당하였다. 심지어 선발된 관료에 대해 중국 왕권은 이들이 선발된 인원의 각 출신지에출신지를 부임시키지피해서 않았다부임시켰다. 또한, 조선의 경우는 중반기 이후부터 녹봉제가 성립되었기에 역시 수취권이 지방 귀족에게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동양적 전제주의' 개념은 한계가 있다.
# 동양 각국이 갖고 있던 정치 특성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모든 동양 국가를 동일한 정치 체제의 틀에서 보았다는 점이다. 가령, 인도의 경우는 전제적 성격과 엄격한 봉건제적(카스트 제도) 성격이 혼재된 정체에 속한다면, 동북아 지역(중국, 베트남 등)의 경우는 관료제의 영향이 훨씬 강했으며, 신분제의 논리가 열화된 상태였다. 이 사이의 차이점은 지대하며, 본질적인 차이로도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를 비트포겐은 이 모두를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