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레닌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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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러한 지론은 생산력 발전을 국가의 단위가 아닌, 세계의 단위에서 보아야 한다는 기준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현재의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로 넘어왔다. 생산력의 과잉 시대로 진입한 현 시점에서 혁명의 고조는 제국주의 분쟁의 중심지인 유럽에서 산발적이며, 분산적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유럽 프롤레타리아 중에서 가장 계급적으로 각성된 의식을 갖고 있다."<ref>블라디미르 레닌 저, 남상일 역, 『제국주의론』(1986년, 백산서당) pp. 100 - 112</ref>라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언급으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이후 1년 후인 [[1918년]]에 [[블라디미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Пролетарская революция и ренегат Каутский)라는 저서를 통하여 독일 내 수정주의자들과 이른바 카우츠키류의 교조주의자들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수정주의와 교조주의는 생산력 발전이라는 논의 차원을 오직 국경으로 선이 그어진 국내 안에서의 생산력 발전에 국한한다는 점이서 비슷한 반혁명 사조라고 비판하였다.
=====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대한 입장 =====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llang|de|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에 따르면, 중국과 인도 등과 같은 아시아 국가는 서양의 봉건제와 차별화 된 정체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역사철학』과 유물사관의 입장에 따라 당시 아시아 사회를 노예제와 봉건제의 성격이 혼재된 정체적(停滯的) 사회라고 진단하였다. 그는 이에 기반하여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봉건제의 상태와 다른 것이며, 모든 경제 요소에 대한 소유 권리를 하나의 전제군주에게 전유한 전제주의 체제의 일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1931년 레닌그라드 회의에서 아시아의 생산양식을 봉건제와 다른, 특수한 무언가라고 보지 않았으며, 카를 마르크스가 동시대에 판별했던 아시아 사회에 대해 '봉건사회'라고 규정하였다. 즉, 스탈린은 당시 아시아에 대해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도식에 맞춰서 해석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동양의 전근대사회의 성격을 서양 봉건사회와 비슷한 단계의 사회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는 산업화 시대에 등장한 반식민지(反植民地) 대열에 선 공산주의자들이 자국을 봉건사회라고 판단한 핵심 근거가 되었다.
===== 인민민주주의 =====
[[파일:Bundesarchiv Bild 183-19400-0029, Berlin, Marx-Engels-Platz, Demonstration.jpg|섬네일|400px|1953년 독일민주공화국에서 행진하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초상화 행렬. 독일민주공화국은 자본주의로 흡수 통일이 되기까지 자국의 사회발전단계를 인민민주주의로 규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