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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임나일본부설}}
 
근초고왕이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일본서기]]》에서에 백제와 왜가 함께 가야를 정복하는 군사행동의 주체가 백제인가 왜인가를 두고 끊임없이 논쟁이 벌어져 왔다. 또한심지어 기록의 신뢰성에기록을 대해과연 믿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도 학자들의 가설이설이 서로 나뉘어 나뉘었다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기록 본문은 다음과 같다.
 
{{인용문|[四十九年春三月, 以荒田別, 鹿我別爲將軍. 則與久■等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新羅. 更復奉上沙白ㆍ盖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 沙沙奴跪【是二人不知其姓人也. 但木羅斤資者, 百濟將也.】領精兵與沙白ㆍ盖盧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ㆍ南加羅ㆍ喙國ㆍ安羅ㆍ多羅ㆍ卓淳ㆍ加羅七國. 仍移兵西廻至古爰津, 屠南蠻枕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ㆍ辟中ㆍ布彌ㆍ支半ㆍ古四邑, 自然降服.]<br />49년(369) 봄 3월에 아라다노와케(荒田別), 가고노와케(鹿兒別)를 장군으로 삼았다. 구저들과 함께 군사를 정돈하여, 탁순국에 건너가서 장차 신라를 치려고 했다. 이 때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br />"군사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겠습니다. 다시 사백(沙白), 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 증원을 청합시다."<br />그리해서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詭)【이 두 사람은 그 성씨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목라근자만은 백제의 장군이다.】에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백, 개로와 함께 보냈다. 모두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비자발(比自○), 남가라(南加羅), 훼국(喙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군사를 옮겨 서쪽을 돌아 고해진(高奚津)에 가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枕彌多禮)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그 왕인 초고와 왕자 귀수가 또한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비리(比利), 벽중(壁中), 포미(布彌), 지반(支半), 고사(古四)의 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ref>《일본서기》에 기록된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이라는 구절을 기존의 학설에서는 후미의 '4읍[四邑]'을 의식해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으로 떼어 읽었으나, <살아있는 백제사>의 저자 이도학 교수는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불미국(不彌國)ㆍ지반국(支半國)ㆍ구소국(狗素國)의 음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이 문구는 '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으로 떼어 읽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ref>}}
 
이 기록을 두고 기록을우선 기록 그대로 믿는 쪽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같은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이었고, 이들은 《일본서기》의 기록된 대로 왜가 백제를 앞잡이로 삼아서 가야를 정벌한 뒤 그 땅에 [[임나일본부]]라는 관청을 두고 100년 가까이 직접통치를 했다고 주장했다. 《일본서기》안에서도 특히나 [[황국사관]]에 찌들어있다고 평가받는 진구 황후조 기사에서, 특히 어렵게 정복한 땅을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남의 나라에 선뜻 주어버렸다는 어이없기까지 한 기록에 대해 "세상에 이렇게 인심 좋은 국제 관계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한국 학계의 비판까지 나올 정도로, 《일본서기》초기기록의 신빙성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진 이래 일본 내에서도 이 학설은 거의 폐기되다시피 한 지 오래다.
 
《일본서기》진구 황후조의 기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한국 일본에서는 여러 가지 학설을 제기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였던 것은 [[천관우]]가 제시한 백제군사령부설이다. 군사령부설의 요체는 《일본서기》의 진구 황후조에서 가야 정벌을 행한 주체를 왜에서 백제로 바꾸어보는 것으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는 원래 백제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군사 기관이었는데 그것을 마치 왜의 통제를 받는 기관처럼 《일본서기》가 주체를 바꾸어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