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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계는 ‘조선마저 후금의 위협에 굴복하여 조선이 이미 후금 수중에 들어갔다’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조선을 감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광계는 감호에 대하여 ’감(監)은 그 정형을 살피는 것이고 호(護)는 그 위태로움을 돕는 것이다(監者察其情形, 護者扶其顛危也)’라고 설명하였다. 즉 조선을 감호한다는 것은 주변 정형(情形, 주변 정세 형국)을 살펴보았다가 위기 발생 시에 원조하겠다는 뜻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주사(陳奏使)로 파견되어 북경에 다녀온 이정구(李廷龜)는 서광계의 감호론을감호론 확대해석하였다제기에 관하여서 왜곡하거나 확대해석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정구는 현재 명 조정에서 조선감호론이 확산되고 있다고있어 매일 조정에서 이에 대하여 논의하고 았으며, 병부상서(兵部尙書) 황가선(黃嘉善)은 서광계의 의견에 반대하였다가 탄핵당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특히 이정구는 서광계의서광계가 감호에 대한 설명에 대하여, ‘감(監)은 그 정형(政刑, 정치와 형벌, 조선의 정치 및 사법 전반)을 감독하는 것이고 호(護)는 그 위태로움을 돕는 것이다(監者監其政刑, 護者扶其顛危云)’라도’라고 왜곡설명하였다고 보고하였다한 바, 이는 察을 監으로 바꾸고, 한국 한자발음으로 같은 ‘정형(情形)’을 ‘정형(政刑)’으로 바꾸어서 과장되거나 왜곡된 사실을 보고한 것이었다.
 
이정구의 의도는 광해군(光海君)의 외교노선에 대한 비판에 있었다. 심하전투 패배 이후, 후금은 조선에 5명의 포로를 송환한 한편, 이들을 통해서 ‘후금국한서달조선국왕(後金國汗書達朝鮮國王)’이란 서신을 조선에 보내어, 명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들과 연합하여 명을 치자는 제의와 함께 답신을 보낼 것을 말하였다. 한편 심하전투에서 패배하녀 후금의 포로가 된 강홍립(姜弘立)은 5명의 포로들을 통하여 광해군에게 비밀장계를 보내어, 후금과 화친할 것을 청하였다.
 
이를 두고 광해군과 조정대신 사이에서 의견 대립이 발생하였다. 비변사(備邊司), 승정원(承政院),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 등은 포로 5명을 처형하고 답신을 보내지 말라고 주장하였으나, 광해군은 포로 처형에 반대하고 즉시 후금에 답신을 보낼 것을 주장하였다. 광해군과 대립하던 서인(西人)의 일원인 이정구는, 서광계의 조선감호론을 왜곡하고 명 조정 내에서의 감호론에 대한 절대적 지지 여론이 있다고 과장되게 보고함으로써, 명 조정 전체가 조선의 정치에 깊이 간여하겠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광해군이 후금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는 외교 정책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려고 한 것이다. 광해군과 가까운 대북(大北) 계열조차도 이정구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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