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필암서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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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필암서원|필암]](筆巖)이라 지은 것은 그의 고향 맥동 마을 입구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라 하며, 바위에는 병계 [[윤봉구]]의 글씨인 『筆巖』이 각자되어 있다.<ref>이 바위의 기운을 받아 ​하서 [[김인후]]가 태어났다고 한다.</ref>
 
[[1786년]](정조 10)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을 추배(追配) 하였다.<ref>전라도 진사 이경집(李敬緝) 등이 상언(上言)하였다.</ref> <ref>[[1796년]](정조 20) 하서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從祀)하고, 시호(諡號)를 「문정(文正)」으로 개시하였다.</ref>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ref>이는 [[필암서원]]이 [[호남 지방]]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함께 [[김인후]]라는 배향 인물이 갖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f> [[2019년]] 7월 10일 [[필암서원]]을 포함한 9개 서원이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ref>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남계서원(1552년), 옥산서원(1573년), 도산서원(1574년), 필암서원(1590년), 도동서원(1605년), 병산서원(1613년), 무성서원(1615년), 돈암서원(1634년)이다.</ref>
 
평지에 자리 잡은 [[필암서원]]은 교육과 학문 수련의 공간을 앞쪽에, 선현에 대한 제사 지내는 공간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인 서원 배치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서원으로,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ref>이는 [[필암서원]]이 [[호남 지방]]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함께 [[김인후]]라는 배향 인물이 갖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f> [[2019년]] 7월 10일 [[필암서원]]을 포함한 9개 서원이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ref>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남계서원(1552년), 옥산서원(1573년), 도산서원(1574년), 필암서원(1590년), 도동서원(1605년), 병산서원(1613년), 무성서원(1615년), 돈암서원(1634년)이다.</ref>
 
[[1975년]] 서원의 건물, 유물, 제향 등의 보존과 관리를 위해 건물과 부지는 [[대한민국의 사적|국가사적]] 제242호에 지정되고, [[필암서원 문적 일괄]]은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587호로 지정되었다.<ref>서원의 『노비보』, 역대 원장들을 기록한 『원장 선생안』, 학생들의 수업을 담당한 교관, 강의에 참석한 인물의 명단 등을 기록한 『보강안』, 강회 참가자의 명단인 『문계안』, 필암서원 소속 유생들의 명단인 『서재유안서』, 필암서원의 재산을 기록한 『필암서원 원적』, 장성부사가 필암서원에 내려준 『장성부사 하첩』등이다.</ref> 또 [[장성 필암서원 하서선생문집목판|하서 선생 문집]] 650여매와 [[장성 필암서원 하서유묵목판일괄|하서 유묵 목판]] 56판은 [[1999년]] 지방유형문화재 제215호와 제216호에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ref>1568년(선조 1) 새긴 『백련초해』 13판과 『유묵』 4판, 그리고 인종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판》 3판으로 1568년(선조 1)과 1770년(영조 46)에 새긴 것과 1610년(광해군 2년)에 새긴 『초서천자문』 18판과 『해자무이구곡』 18판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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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가치 ==
* 그리 높지 않은 성진산(聖眞山)이 뒤를 감싸고 앞에는 문필천(文筆川)이 흐르고 있는 평지에 자리 잡은 서원은 교육과 학문 수련의 공간을 앞쪽에, 선현에 대한 제사 지내는 공간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전형적인 띠고서원 있는데,배치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서원이다. 이는 학문을 중시했던 하서 [[김인후]]의 뜻을 기리기 위함으로 알려지고 있다.
* [[조선시대]] [[서원]]의 주요 기능인 '교육'과 '제향'이 균형을 이루던 시기에 조성된 건물로 서원 건축의 기본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조선 시대]] [[서원]] 공간의 꾸밈새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적지가 되고 있다.
* [[호남지방|호남]] 최대의 사액서원으로 호남 [[유교|유학]]의 총 본산(本山)이며, [[호남]] 사림들의 기풍 진작과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