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사와라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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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사와라 사건'''(小笠原事件) 혹은 '''지치지마섬 식인 사건'''(父島事件)은 1945년 2월 23일부터 25일 사이에 [[오가사와라 제도]]의 [[지치섬]]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일본군]] 장군과 장교 및 병사들이 포로가 된 [[미 해군]] 소속 비행사들을 구타하여 죽인 다음, 그 시체를 잘게 잘라 인육을 먹은 일이다.
 
== 경위 ==
 
당시 지치섬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육군은 [[다치바나 요시오]](立花芳夫) 소장이 이끄는 5개 보병대대 등 약 9000명의 병력으로 이뤄졌으며, 해군은 [[모리 구니조]](森國造) 소장 휘하에 치치시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약 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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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치 섬의 경우는 기아나 식량부족이 원인이 아니었다. 당시 지치 섬의 식량상황을 보더라도, 쌀 배급량이 5홉에서 3홉으로 줄었지만 본토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다. 이걸 볼 때 지치섬에서는 기아 때문이 아니라 술안주감으로 포로를 잡아먹었다는 걸 알 수 있다.
 
== 사건 이후 ==
재판 결과 다치바나 중장, 마토바 소좌, 이토 중좌, 요시이 대좌, 나카지마 대위에겐 사형(교수형)이 선고됐고, 모리 중장<ref>남방 전선당시 네덜란드 포로에 대한 학살죄를 부하 장교인 호리우치 도모아키 대좌에게 뒤집어 씌어 처형당하게 만든 일이 있었고, 후에 진상이 밝혀지면서 네덜란드 측에 의해서 다시 기소가 되었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에 처해졌다.네덜란드 측에서도 얼마나 빡돌았는지 모리 구니조의 시체를 루이스 경기관총으로 걸레짝으로 만들었으며 호리우치 도모아키 대좌의 유가족에게 사죄의 편지와 배상금을 지불했다고 한다.</ref>과 가토 대좌, 야마시타 대위, 도키 대위, 사토 대위는 종신형에 처해졌다. 해군의 가미우라 소좌는 구류 중 자결했으며, 일본 본토로 귀환한 뒤 도망갔던 고야마 소위는 집 근처 야산에서 역시 자결했다. 마찬가지로 도망갔다가 나중에 재판을 받은 데라키 군의관은 4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결과 다치바나 중장, 마토바 소좌, 이토 중좌, 요시이 대좌, 나카지마 대위에겐 사형(교수형)이 선고됐고, 모리 중장<ref>남방 전선당시 네덜란드 포로에 대한 학살죄를 부하 장교인 호리우치 도모아키 대좌에게 뒤집어 씌어 처형당하게 만든 일이 있었고, 후에 진상이 밝혀지면서 네덜란드 측에 의해서 다시 기소가 되었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에 처해졌다.네덜란드 측에서도 얼마나 빡돌았는지 모리 구니조의 시체를 루이스 경기관총으로 걸레짝으로 만들었으며 호리우치 도모아키 대좌의 유가족에게 사죄의 편지와 배상금을 지불했다고 한다.</ref>과 가토 대좌, 야마시타 대위, 도키 대위, 사토 대위는 종신형에 처해졌다. 해군의 가미우라 소좌는 구류 중 자결했으며, 일본 본토로 귀환한 뒤 도망갔던 고야마 소위는 집 근처 야산에서 역시 자결했다. 마찬가지로 도망갔다가 나중에 재판을 받은 데라키 군의관은 4년형을 선고받았다.
 
다치바나나 마토바의 경우는 유서나 최후진술이 없어서 그들의 심경을 헤아릴 수는 없다. 다만 두 사람은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약 1년 동안 매일 미군 병사들의 학대로 거의 초주검이 되어 사형대에 올랐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때, 지치섬 폭격에 나섰던 미군 조종사 가운데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1988년 펴낸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전쟁 중 경험한 최악의 시기였다고 밝혔다.
 
== 각주 ==
<references />
 
[[분류:1945년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