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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대는 [[전라남도]] [[영광군 (전라남도)|영광군]]에 살았지만 아버지 고자검의 대에 영광에서 [[광산군]] 압촌마을로 이주해 왔다.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그 뒤 늦게 [[1540년]](중종 35년) [[과거 제도|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봉렬대부(奉列大夫) 행 예조정랑[[예조]][[정랑]](行禮曹正郞)으로 [[춘추관]]기주관(記注官)을 겸하여 [[중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이후 홍문관(弘文館)에 올랐고, [[1546년]](명종 1)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7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된 뒤, [[1550년]] [[5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으며 이때 양사에서 [[진복창]] 일파를 논죄할 때 구수담·송순·허자·이준경·이윤경 등을 함께 죄인을 두둔했다며 공격하였으며 7월까지 계속 구수담 등을 논핵하였다. 다음해 10월 28일 특지(特旨)로 옥천군수(沃川郡守)에 발령되었다. 이후 [[관찰사]] 이몽량(李夢亮) 등의 보고가 임금에게 전달되어, [[1553년]] 10월 23일 선정을 베푼 지방관을 시상할 때 폐단을 제거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1558년]](명종 13) 장령이 되었다. [[1558년]] 이후 장령, 헌납, 집의 등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1560년 2월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세자시강원보덕으로 있을 때 특별히 가자(加資)되고, [[1561년]](명종 16년) [[2월 10일]] [[강원도]][[관찰사]]로 발령되었다. 그는 이량(李樑)과 정치적인 식견을 같이하며 항상 이량의 당여(黨與)로서 항상 측근에 있고 싶어하였다.
 
그 뒤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량]]을 발탁, [[이량]]이 [[평안도]][[관찰사]]에서 내직으로 들어오자, 그 또한 병을 핑계로 사퇴하였다가 내직으로 들어왔다. [[1560년]] 세자 시강원 보덕, [[1561년]] 2월 10일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3월 8일 체직되어 왔다. [[1562년]] 중추부[[첨지]]사, 동부승지, 대사간 등을 거쳐 그해 8월 [[홍문관]][[부제학]], [[형조]][[참의]], [[10월]] [[병조]][[참의]], [[11월]] [[병조]][[참지]](參知) 등을 역임하였다. [[1563년]](명종 18)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절충장군 행 [[충무위 ]]상호군(折衝將軍行忠武衛上護軍)으로 전직되고, 다시 [[이조]][[참의]], [[호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63년]]홍문관부제학 [[8월]] [[이량]]이지제교에 [[심의겸]]과 [[기대항]]의 탄핵을 받고 몰락하자 양사에서 [[이량]]의 당여를 탄핵할 때, 고맹영도 유배시킬 것을 요청하였다이르렀다. 그해 [[이량]], [[윤백원]] 등이 실각했지만 그는 어떤 이유인지 파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거듭 탄핵을 받다가 [[1565년]] 파직당하고, 유배되었다. [[1565년]](명종 20) [[사헌부]]집의 [[홍인경]](洪仁慶) 등이 그에게는 큰 잘못이 없다며 극력 두둔하여 고맹영(高孟英)과 이언충(李彦忠) 등은 가벼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 일로 홍인경 등은 조야의 원성을 받았다. 그해에 유배지(배소)에서 사망하였으나 사망일자는 미상이다. 사후 시신은 광주목(光州牧) 유등곡면(柳等谷面 압보촌(鴨保村)(뒷날의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에 매장되고, 부인의 묘소는 바로 뒤에 매장되었다.
 
[[1563년]] [[8월]] [[이량]]이 [[심의겸]]과 [[기대항]]의 탄핵을 받고 몰락하자 양사에서 [[이량]]의 당여를 탄핵할 때, 고맹영도 유배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그해 [[이량]], [[윤백원]] 등이 실각했지만 그는 어떤 이유인지 파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거듭 탄핵을 받다가 [[1565년]] 파직당하고, 문외출송령이 내려졌다가 다시 유배되었다. [[1565년]](명종 20) [[사헌부]]집의 [[홍인경]](洪仁慶) 등이 그에게는 큰 잘못이 없다며 극력 두둔하여 고맹영(高孟英)과 이언충(李彦忠) 등은 가벼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 일로 홍인경 등은 조야의 원성을 받았다. 그해에 유배지(배소)에서 사망하였으나 사망일자는 미상이다.
 
=== 사후 ===
사후 시신은 광주목(光州牧) 유등곡면(柳等谷面 압보촌(鴨保村)(뒷날의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에 매장되고, 부인의 묘소는 바로 뒤에 매장되었다. 묘소는 다시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의 사당 추원각(追遠閣)과 고씨 삼강문 뒷편으로 옮겨졌다.
 
이후 [[임진왜란]] 때 아들 [[고경명]], 손자 [[고인후]]가 전사하고, [[고종후]]는 [[진주성]]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그는 죄안에 올라 사면복권되지 못했다. [[1612년]](광해군 4) 손자 고용후(高用厚)가 상소를 올려 그의 아들 고경명의 연고로 고맹영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자, 이조와 광해군의 논의 끝에 이로 말미암아 추후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뒤에는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세자부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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