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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하여 군사를 사살하고 배를 불태웠다. 통분할 일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선들을 모두 불러모아 합세해서 조선 수군을 섬멸하자. 그리고 곧장 경성으로 올라가자.<난중일기>"</b>
 
벽파진(碧波津)에서 우수영 앞바다로 본진을 옮긴 이튿날인 [[10월 26일]]([[음력 9월 16일]]) 새벽 3~4시 경 어란진에서 출병한 일본 수군 130(혹은130여 200여척)여 척이이상이 7~8시 경 순조(順潮)를 타고 울돌목(鬱陶項)을 지나 임하도(林下島)로 접근했다. 일본 수군 지휘부는 중형 군선인 관선(세키부네)로 진영을 짜고 대열을 맞추며 울돌목(鬱陶項)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때 조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즉, 일본 수군의 진격 방향이 조류의 흐름과 일치하는 순방향이었다.
이순신은 여러장수(6척의 판옥선 장수)에게 명령하여 임하도의 좁은 목(項)에 닻을 내리고 뱃머리를 잇대어(배 사이의 간격을 없게 함) 적이 오기를 기다리게 했다. 그곳을 막음으로써 임하도의 안쪽 바다는 포구(浦口)가 된 셈이었다. 일본 수군을 좁은 목(項)과 포구(浦口)에 가두어서 섬멸하려는 것이 이순신의 계략이었다.<br>
*조선 수군 공격대:통제사(統制使)이순신(李舜臣),김억추(金億秋),배흥립(裵興立),송여종(宋汝悰),정응두(丁應斗),안위(安衛),김응함(金應諴)<ref>난중일기-이순신 지음</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