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희 (1905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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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후 ===
[[8·15광복]] 이후 박상희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때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언론인으로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일했고 [[신간회]] 간부로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경력이 작용한 것이었다.<ref name="m516" /> [[건국준비위원회]]의 구미지부를 창설하였고, 이어 [[인민위원회]] 지부의 내정부장을 역임하였다.
[[8·15광복]] 이후 박상희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때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언론인으로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일했고 [[신간회]] 간부로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경력이 작용한 것이었다.<ref name="m516" /> [[건국준비위원회]]의 구미지부를 창설하였고, 이어 [[인민위원회]] 지부의 내정부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선산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는다.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박상희는 [[신탁통치 반대운동]]도 지도하였다. 그러나 [[김일성]],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의 입장으로 돌아서버리자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는다.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박상희는 [[신탁통치 반대운동]]도 지도하였다. 그러나 [[김일성]],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의 입장으로 돌아서버리자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1946년]] [[10월]] 대구 항쟁 사건이 발생하였고 박상희는 [[10월 3일]] 2000여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오전 9시에 구미경찰서를 공격, 경찰관과 우익인사들을 감금했다. 이어 구미면사무소와 선산군청을 타격하여 식량 130여 가마니를 탈취하고, 관청 서류를 전량소각했다.
 
[[1946년]] [[10월]] 대구 항쟁 사건이 발생하였고 박상희는 [[10월 3일]] 2000여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오전 9시에 구미경찰서를 공격, 경찰관과 우익인사들을 감금했다. 이어 구미면사무소와 선산군청을 타격하여 식량 130여 가마니를 탈취하고, 관청 서류를 전량소각했다. [[10월 6일]] 경찰이 경찰서에 공격 발포한 총을 맞고 사살되었다.
[[10월 6일]] 경찰이 경찰서에 공격 발포한 총을 맞고 사살되었다.
 
==가계(家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