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보니파시오 9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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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선출 이후 ==
보니파시오 9세는 재위기간 동안 마침내 골치아픈 로마 현 코무네의 독립 문제를 해결하고, [[산탄젤로 성]]을 요새화하고 다리를 놓음으로써 로마에 대한 세속적 통치권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아시시페루자]] 지방이나 [[페루자아시시]]에서 좀 더 평화로운 환경에서환경하에 오랜 시간을 보냈다. 또한 그는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으로부터 오스티아 항구를 환수하였다. 보니파시오 9세는 점차 [[교황령]]의 주요 성들 및 도시들의 통치권을 되찾았으며, 15세기에 이르러 교황령을 재건했다.<ref name="Catholic"/>
 
1394년 9월 16일 아비뇽에서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했다. 그러자 프랑스파 추기경들은 서둘러 9월 28일 스페인 태생 페드로 데 루나 추기경을 그의 후임자로 선출했다. 바로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이다. 향후 몇 년에 걸쳐 보니파시오 9세는 그의 강력한 지지자들인 잉글랜의 [[리처드 2세]]와 프랑크푸르트 의회, 신성 로마 제국의 [[바츨라프 4세]] 등으로부터 교황좌에서 물러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부하였다. 서방교회 대분열(서구 대이교를대이교)을 종식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라는 요구가 커졌지만, 보니파시오 9세 재위기간 동안에는 공의회를 소집하려는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ref name="Catholic"/>
 
보니파시오 9세의 치세 동안 로마에서는 두 차례 성년을 지냈다. 첫 번째 성년은 1390년의 것으로, 그의 전임자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언한 것이었다. 독일과 헝가리, 폴란드, 보헤미아, 잉글랜드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로마를 많이 찾아왔다. 독일의 일부 도시들에서는 성년 순례가 인정되어 전대사를 발표했으나 대사 설교에 있어서 남용과 추문이 일어나기도 했다. 1400년에 지낸 두 번째 성년은 특히 전염병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수많은 순례자가 로마를 방문하였다. 보니파시오 9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로마에 그대로 머물렀다.<ref name="Cathol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