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유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3번째 줄:
 
== 경과 ==
[[1303년]]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대립이 있던 중에 프랑스군이 이탈리아 [[아나니]]의 별장에 있던 교황을 습격한 [[아나니 사건]]이 터져 이후 교황은 [[프랑스의 군주|프랑스 국왕]]의 꼭두각시가 되어 갔다. 1305년 프랑스 출신 추기경 베르트랑이 [[교황 클레멘스 5세]]로 즉위하면서 필리프 4세의 요청에 따라 1308년에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로 이주하였으며 1309년에 아비뇽에 거처를 두었다.

아나니 사건 이후의 처리를 위해 [[비엔 (이제르주)|비엔]]의 [[비엔 공의회]]([[:fr:Concile de Vienne|fr]])를 열기 위한 준비를 하던 사이에, [[이탈리아 반도]]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7세 (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7세]]의 침략을 받아(1310~1313) 교황은 이탈리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결국 프랑스에 계속 체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아비뇽은 프랑스 왕국의 영내가 아니라 교황의 [[봉신]]인 프로방스 백작의 영지였다. 아비뇽 유수 기간에는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며 교황 또한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아비뇽 체재 중에 [[교황 클레멘스 6세]]로부터 성직 또는 사절의 지위에 임명되었지만, 교황청의 부패상과 교황이 로마를 떠나 있는 것에 대해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에게 종종 로마로의 귀환을 호소하였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아비뇽이 서방의 바빌론으로 표현되고 있다.
 
1377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드디어 로마로 귀환함으로써 유수는 종식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서방교회 대분열'이라는 불행한 사건이 다시 발생하고 말았다. 그레고리오 11세는 다음 해인 1378년에 선종하자 로마에서 새로 선출된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신임교황과 친 프랑스파 추기경들간에 심각한 수준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친 프랑스파 추기경들은 아나니에 모여 [[콘클라베]] 무효를 선언하고 폰디로 장소를 옮긴후 제네바 태생 로베르 추기경을 클레멘스 7세로 하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였다. 클레멘스 7세가 우르바노 6세의 축출에 실패하였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아비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교황청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이 공존하는 [[서방 교회의 분열|서방교회의 대분열]]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친 프랑스파 추기경들은 아나니에 모여 [[콘클라베]] 무효를 선언하고 폰디로 장소를 옮긴후 제네바 태생 로베르 추기경을 클레멘스 7세로 하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였다. 클레멘스 7세가 우르바노 6세의 축출에 실패하였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아비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교황청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이 공존하는 [[서방 교회의 분열|서방교회의 대분열]]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br />
 
== 아비뇽 유수기의 교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