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구수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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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년]], [[부여수|태자 수]]는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남방]]을 정벌하여 마한 54개국 가운데 4개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틈을 이용해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치양성(雉壤城, 황해도 배천, 구 모로성) 부근을 약탈하자 부여수가 군사를 이끌고 맞섰다. 이때, 근초고왕의 말 말굽을 상하게 한 죄로 고구려로 달아났던 [[사기 (백제)|사기]]가 다시 백제에 투항하여 '고구려 군사는 머리수만 채운 허세이며,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붉은 깃발의 부대 뿐'이라고 고구려의 군사정보를 부여수에게 알려줌으로써 백제는 사기의 말대로 고구려의 적기부대(赤旗部隊)를 먼저 공격하여 크게 무찌르고, 그 기세를 몰아 수곡성까지 함락하였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부여수는 여세를 몰아 진격을 계속하고자했다. 그러나 장군 [[막고해]]가 조언하기를 “일찍이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더 많은 것을 구합니까?"라고 《노자 도덕경》의 내용을 인용하여 간하니 태자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멈추고 그곳에 돌을 쌓아 표지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며 "지금 이후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라고 말하였다. [[371년]] 고구려가 또 다시 침입하자 부여수는 부왕 근초고왕과 함께 군사를 패수에 매복시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기세를 몰아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 치세정치적 흥망 ===
[[375년]] 11월 부여수는 근초고왕의근초고왕이 붕어로사망하자 왕위에 오른다. 이듬해([[376년]]) 장인 [[진고도]]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진(眞)씨가가씨가 최고의 권세를권력을 가지게되었으며.차지하였고, 내정이 주로 진씨에게 맡겨졌다.
 
==== 고구려와의 전쟁 ====
[[376년]] [[고구려]] [[소수림왕]]이 공세를 강화하여 11월 백제 변경을 공격해왔다공격했다. 근구수왕은 대노하여 다음 해 [[377년]] 10월 3만3만명의 대군을 이끌고병사로 평양성을 재차 공격하였으나, 소수림왕의 방어를 뚫지 못하였고패배하였고, 그 해 11월 고구려의 보복 공격이 있었다. 전쟁은 치열했지만,그러나 이상기후가 겹치면서 [[고구려 백제 전쟁|제1차 여제전쟁]]은 사실상고구려의 대승리로 끝이 났다.
 
==== 내정자연재해 ====
다음은 [[부여수|근구수왕]]대에 일어난 자연재해의재앙의 기록이다.
 
[[379년]] 4월에 하루 종일 흙이 비처럼 내렸다[雨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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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년]] 봄에 가뭄이 들어 6월까지 계속되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까지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해 왕은 국가창고의 곡식을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푸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 동진과의 관계 ====
《[[삼국사기]]》 《[[백제본기]][[부여수|근구수왕]]기에는근구수왕기에는, [[379년]] 3월 동진에 조공하려 했으나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되돌아 왔다고 하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고, [[양서]](梁書) [[백제]]전에서는백제전에서는 '동진 [[태원]](太元)년간([[376년]]~[[396년]]) [[백제]]왕백제왕 [[부여수|수]](須)가, …중략… 생구(生口, 노예)를 헌상(獻上)했다헌상했다.'고 기록되어있다.
 
====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