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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안은 평생 [[잉글랜드]]의 [[노리치]]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3~14세기에 잉글랜드에서 [[런던]]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가 노리치였고 농업과 교역의 중심지였다.{{sfn|Ramirez|2016|p=17}} 줄리안의 생전에 [[흑사병]]이 노리치를 덮쳐 인구의 반 이상을 사망하게 만들었고, 그 무서운 전염병은 1387년까지 반복적으로 창궐했다.{{sfn|Ramirez|2016|p=17}} 줄리안은 1381년 [[농민의 난|와트 타일러의 난]]이 발발하여 제프리 릿스터(Geoffrey Litster)가 이끄는 혁명 세력이 도시 전체를 압도해버리는 것도 지켜봐야 했다. 제프리 릿스터는 농민군이 [[노스월셤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헨리 르 디스펜서]]에 의해 처형되었다.{{sfn|Ramirez|2016|pp=25-6}} 당시 노리치의 주교이자 잉글랜드의 귀족이었던 디스펜서는 카톨릭 교회의 개혁을 주창한 [[롤라드파]]에 강력 반대한 인물이다. 많은 롤라드파 사람들이 노리치 외곽 가까이에 만들어졌던 롤라드 구덩이(Lollard's Pit)에서 화형에 처해졌다.{{sfn|Ramirez|2016|p=17}}
 
당시 유럽에서 가장 종교적인 도시 중 하나였던 노르위치에는 대성당과 수도원과 여러 교회와 은둔자들의 독방이 산재해 있었다. 도시의 풍경이 그러하였고, 그 자체가 시민들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동쪽에는 1096년에 지어진 노리치 [[대성당]]과 [[베네딕도회]]에서 운영하던 [[사도 바울로]] 병원(the Benedictine Hospital of St. Paul), [[가르멜회]] [[수도원]], 세인트 자일 병원(St. Giles' Hospital), [[프란치스코회]] 수도원(the Greyfriars monastery)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도시 성벽 바로 밖 캐로우(Carrow)에 작은 수도원이 서 있었다.{{sfn|Windeatt|2015|pp=xxxiii-iv}}{{sfn|Rawcliffe|Wilson|2004|p=88}} 수도원은 노리치에 있는 세인트 줄리안 교회, 올 세인츠 팀버힐(All Saints Timberhill) 교회, 세인트 에드워드 코니스포드(St. Edward Conisford) 교회, 세인트 캐서린 뉴게이트(St. Catherine Newgate) 교회 같은 수도원 소유의 부동산을 임대해서 받는 소득으로 운영되었다. 그 중 세인트 줄리안 교회만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교회들에는 하나같이 [[은자]]의 방이 있었고, 그 방들은 그 수도원의 명성을 높이는 기능을 하며 사회 전역으로부터 [[유산|유산(재산)|유산]]과 [[기부]]를 끌어모았다.{{sfn|Rawcliffe|Wilson|2004|p=89}}<ref>{{cite web |url=https://oxoniensia.org/volumes/1998/jones.pdf|title= The Hermits and Anchorites of Oxfordshire|last=Jones |first=E.A. |date= |website= Oxoniensia|publisher= |pages=56-7|access-date=4 September 2019 |quote=}}</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