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Gcd822 (토론 | 기여)
→‎권력 분산과 집중화: 다른 문단과 중복되는 내용 제거
Gcd822 (토론 | 기여)
잔글 →‎민심안정책: 링크
72번째 줄:
광종은 정치적 역량과 대외적 위상을 제고하는 것 이외에도 민심 안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ref name="pare199679"/> 민심을 안정시키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형 정종의 [[서경]] 천도 추진과정에서 뼈저리게 깨달았던 그는 민심을 얻는 것이 곧 힘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ref name="pare199679"/> 광종은 민심 안정책을 불교를 통해 추진하였다. 그는 [[951년]] 대봉은사를 개성 남쪽에 세워 태조의 명복을 비는 원당으로 하고, 불일사를 동쪽에 세워 신명순성왕후<ref name="pare199679"/> 의 명복을 비는 원당으로 삼았다.
 
[[954년]]에는 신명순성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숭선사를 창건하였으며, [[화엄종]] 승려 균여와[[균여]]와 교분을 갖고 그의 '성상융회(性相融會)' 사상을 받아들였다.<ref name="pare199680">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80페이지</ref> 성상융화사상이란 일종의 불교 종파융합책으로, 당시 [[불교]]는 교종이[[교종]]이 융성했는데, 교종 내에서도 성종과 상종이 있었다. 성종의 대표적인 종단은 화엄종이었고, 상종의 대표적인 종단은 법상종이었다. 이 두 종단의 특징은 이질 집단을 통합할 수 있는 융화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ref name="pare199680"/> 균여는 바로 이 원리를 통하여 민심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다고 보았고, 광종이 이에 적극 동조했다.<ref name="pare199680"/> 광종은 이들 종단이 융화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 화엄종과 법상종계 승려들과도 자주 면담하며 민심을 [[불심]]으로 단결시킬 방안을 강구했다.
 
[[균여]]의 성상융회 사상은 화엄종과 법상종을 하나의 사상으로 이끌어내자는 논리였다. 당시 화엄종과 법상종을 신봉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개 중소 호족이나 평민들이었는데, 대호족을 경계하던 광종은 중소호족들과 평민들의 힘을 키울 요량으로 두 종파의 융회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953년]](광종 4년) 화엄종 승려 겸신이 국사로 봉해지기도 했다. 이같은 화엄종, 법상종 장려와 융화정책은 곧 중소 호족들의 지지를 얻게 되고, 반대로 대부호들의 불교적 기반을 무너트리는 역할을 했다.<ref name="pare1996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