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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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기]]는 등용 당시 전격적으로 원보의 관직에 오른다. 이 때문에 호족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광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광종은 오히려 그를 다시 [[한림]][[학사]]로 승격시켜 학문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게 했다.<ref name="pare199692">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92페이지</ref>
 
그는 당 태종의 치세와 후주 태조의 치세에 관심을 두었다. 후주 태조는 제후국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당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과거제를 비롯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실시했고, 그 결과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ref name="pare199691"/> 쌍기는 그 개혁과정에서 과거에 관한 실무를 맡았던 인물이다<ref name="pare199691"/> 쌍기는 강력한 왕권의 확립을 주창하였다. 쌍기는 고려 조정이 소수의 특정 문벌가문에 의해 모든 것이 장악된 것을 지적하고, 문벌가문의 세력형성 혁파가 필요하다고 건의하였다.
 
광종도 당대의 후주의 개혁 소식을 진작에 듣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도 후주를 모범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ref name="pare199691"/> 일부 호족들이 자기 가문의 외손이나 연고지를 추대하려는 택군 시도를 한 것을 경험하면서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호족들이 외척과 [[개국공신]] 등 공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온갖 권력을 독점한 것 역시 염증을 느끼게 하였다. 또한 광종은 [[중국]] 대륙이 [[5대 10국]]으로 혼란을 거듭한 점과 [[일본]]이 여러 지방국으로 분열된 점, 북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대치하고 [[후발해]]국이 [[거란]]과 [[고려]]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 등의 국제정세는 외세의 내정간섭이 없이 개혁을 수행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고려에는 개혁을 추진할 인물이 없었다. 그러던 중 후주의 2대 왕 [[후주 세종|세종]]이 즉위하면서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다. 광종은 형식적으로 칭신하여 제후의 예로서 그를 대하였다. 고려가 [[951년]]부터 후주의 연호를 사용했고, 세종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다. 후주 측은 1차로 광종을 고려[[국왕]]에 [[책봉]]하는 [[책봉사]]를 보내왔고, 다시 2차로 광종을 [[검교]][[태사]]로 임명하여 고려 백관들에게 관복의 복식을 중국식으로 바꾸기 위해 책봉사와 자문관을 [[송도]]로 파견하였다.
 
===== 노비안검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