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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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일부 신라계 김씨에서 본관의 뿌리를 태보공 [[김알지]]나 [[태종무열왕|무열왕]], [[신무왕]] 등으로 삼는 경우가 있지만, 계대를 정확하게 고증할 수는 없고, 이는 후대에 자신들의 본관 시조로 삼은 것일 뿐이다.<ref>[[김알지]]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현존하는 김씨 계는 28여개이다.</ref>
 
== 본관 ==
또 [[고려]]· [[조선]] 왕조 대에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군역· 부역 면제 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졌는데,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경순왕]] 후손으로서 특전을 누린 이들이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족보 위조(僞造) 현상이 심해졌다.
[[경주시|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 6촌(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사로(斯盧)· 사라(斯羅)라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삼았다가, [[307년]](기림왕 10)에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시|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식읍으로 주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시|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러한 보계(譜系) 위조 현상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들어 극에 달한다. 족보를 우후죽순 발간하면서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무슨 시호와 군호를 붙여 미화하고 상계를 [[경순왕]]대 까지 끌어 올려 표기한 경우가 만연했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낙랑군(樂浪郡)이라 개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였으며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308년]](충렬왕 10)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413년]](태종 13) [[경주시|경주]](慶州)로 개칭하고,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蔚山)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대구부 경주군(慶州郡)이 되었다가,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 분파 ==
《씨족원류》 및 《김씨 분관록》 등의 문헌(文獻)에 의하면 [[조선]]조 들어와 [[김알지]]의 후예라 전하는 [[고려]] 평장사 정평공 '''김봉모'''(金鳳毛), [[헌강왕]]의 후예라 전하는 [[고려 예종]] 때 검교태자태사 '''김인관'''(金仁琯), [[원성왕]]의 후예라 전하는 [[고려]] 초 장군 '''김순웅'''(金順雄), [[경순왕]]의 후예라 전하는 [[고려]] 초 벽상공신 내사령 '''김예겸'''(金禮謙){{·}}[[고려]] 말 판도판서 '''김장유'''(金將有), [[김알지]]의 후예라 전하는 고려초 호장 '''김위영'''(金魏英), [[경순왕]]의 후예라 전하는 상서 '''김여진'''(金麗珍){{·}}목사 '''김소'''(金邵) 후손을 중심으로 [[경주시|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분파하였다. [[경주시|경주]]의 고호가 월성(月城) 이었던 관계로 경주 김씨(慶州 金氏)를 [[월성 김씨]](月城 金氏)라고도 한다. 이들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수십 개의 지파로 나누어졌다.
 
파조 이전의 상계(上系)는 각종 병란(兵亂) 및 외적의 침입 등으로 인해 문헌(文獻)과 유적(遺蹟)이 멸실되어 자세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 중 하나로, [[2000년]] 인구조사에 54만 2천 18가구에 173만 6천 7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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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조 '''김중약'''(金仲約) :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다.<ref>[[조선 정종]]의 아들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의 빙부(聘父)이다.</ref>
 
== 본관경순왕 자녀 대두 ==
=== 족보 위조 ===
[[경주시|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 6촌(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사로(斯盧)· 사라(斯羅)라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삼았다가, [[307년]](기림왕 10)에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고려]]· [[조선]] 왕조 대에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군역· 부역 면제 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졌는데,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경순왕]] 후손으로서 특전을 누린 이들이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족보 위조(僞造) 현상이 심해졌다.
 
이러한 보계(譜系) 위조 현상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들어 극에 달한다. 족보를 우후죽순 발간하면서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무슨 시호와 군호를 붙여 미화하고 상계를 [[경순왕]]대 까지 끌어 올려 표기한 경우가 만연했다.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시|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식읍으로 주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시|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낙랑군(樂浪郡)이라 개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였으며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308년]](충렬왕 10)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413년]](태종 13) [[경주시|경주]](慶州)로 개칭하고,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蔚山)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대구부 경주군(慶州郡)이 되었다가,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 경순왕 자녀 대두 ==
=== 《김은열 묘지명》 ===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김은열 묘지석》을 우연히 발견하여 김노규(金魯奎)가 찬한 《김은열 묘지명》에 [[경순왕]]은 [[고려]]에 고려에 항복 후 8자들을 더 두었는데 「일(鎰)·굉(鍠)·명(鳴)·은열(殷說)·중석(重錫)·건(鍵)·선(鐥)·종(鐘)」이라 한다. 또 제2자 '굉'(鍠)과 제4자 '은열'(殷說)은 국구(國舅. [[고려 경종]] 장인)의 아들로 고려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공(功)이 있는 신하(臣下)여서 장지(葬地)를 특사(特賜)하니 성북 10리 밖 오룡산 남쪽 기슭 30리 주변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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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등재된 《김은열 묘지명》은 찬(撰)한 사람도 없으며, 배위(配位)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녀들 이름 또한 《고려사》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묘지문》을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 [[김사목]](金思穆)은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4자 '은열'(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으로 작호(爵號)까지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 《신라경순왕전비》 ===
[[1814년]]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경순왕]]은 전비(前妃) 박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마의태자|태자]](太子)·[[김덕지|차자]](次子)·영분공(永芬公)이요, 1녀는 [[고려 경종]]의 왕비라 한다. 후비(後妃) 왕씨와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은열(殷說)·석(錫)·건(鍵)·선(鐥)·추(錘)」요, 2녀들은 이금서(李金書)·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전비(前妃) 박씨 소생으로 영분공(永芬公)을 3자로 추가하고,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1자 일(鎰)·2자 황(湟)·3자 명종(鳴鍾)」을 배제하였다. 또 「제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제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고, 2녀를 추가하였다.<ref>[[경주]](慶州)를 본적으로 둔 후손들은 4갈래로 분파되었는데, '영분공파'(永芬公派), '시중시랑공파'(侍中待郎公派), '태사공파'(太師公派), '판도판사공파'(版圖判事公派)라 한다.</ref>
 
=== 《김씨 분관록》 ===
[[1887년]] 경주 김씨 후손 김창희(金昌熙)가 숭혜전(崇惠殿) 건립 때 각 김씨 문중에서 제출한 수단(收單)을 바탕으로 경주 김씨 분파(分派) 시말을 기록한 《김씨 분관록(金氏 分貫錄)》을 편찬하였는데, 그의 증조부 [[김사목]](金思穆) 및 아버지 김정집(金鼎集)이 근기한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8자(子)들을 모두 배척하고, [[경순왕]] 아들들 「의성군(義城君) 석(錫), 언양군(彦陽君) 선(鐥), 삼척군(三陟君) 추(錘)」는 [[의성 김씨]], [[언양 김씨]], [[삼척 김씨]] 시조가 되었다고 하였다.<ref>경주 김씨 분파에 대해서는 [[경순왕]]의 후예인 벽상공신 내사령 '김예겸'(金禮謙), 판도판서 '김장유'(金將有), 평장사 '김봉모'(金鳳毛), 장군 '김순웅'(金順雄)과 [[헌강왕]]의 후예인 태사 '김인관'(金仁琯) 및 호장 '김위영'(金魏英), 상서 '김여진'(金麗珍), 목사 '김소'(金邵), 판서 '김의'(金義), 판서 '김덕재'(金德載), 직장 '김수구'(金壽龜), 상호군 '김중약'(金仲約)등이 파조가 되어 분파되었다고 한다. </ref>
 
=== 《증보문헌비고》 ===
[[1908년]] 칙명(勅命)으로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 [[경순왕]] [[왕자]](王子)들의 이름ㅇ른 역사(歷史)에 실명(失名)인데, [[마의태자|태자]](太子)·[[김덕지|별자]](別子)라 한다. 또 다른 아들 김영분(金永芬)을 두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