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5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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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후의 반란 ===
하인리히 5세가 독일에 되돌아가면서 위협이 사라지자, [[로마 가톨릭교회]]는 하인리히 5세를 파문해버려 둘 사이에 맺어졌던 협약은 금세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력 확대를 도모하는 각지의 영주가 하인리히 5세에 대항했다. 마인츠 대주교 아달베르트가 라인란트 고지 지방에서 소요를 선동하고, [[작센 공작]] [[로타르 3세|주플린부르크의 로타르]]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일으킨 반란은 [[1115년]]에 하인리히를 패배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력 확대를 도모하는 각지의 영주가 하인리히 5세에 대항했다. 마인츠 대주교 아달베르트가 라인란트 고지 지방에서 소요를 선동하고, [[작센 공작]] [[로타르 3세|주플린부르크의 로타르]]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일으킨 반란은 [[1115년]]에 하인리히를 패배시켰다.
 
[[1119년]] 그 자신이 아버지를 강압해 왕위를 빼앗었던 마인츠 왕국 회의에서 독일의 영주들에게 로마 교황과의 화해를 강요당했다. 그 후 여러 번의 교섭 끝에 [[1122년]]에 [[보름스 협약]]이 체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