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피누스 2세 (아키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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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5년]] [[보르도]] [[공작]] [[세귄 2세 (보르도)|세귄]]이 피핀에게로 망명해왔다. 피핀은 카를 2세의 휘하에 있던 세귄을 설득해 왔다. 피핀은 세귄에게 줄 정착지로 [[바스코눔]](Wasconum) [[공작]]령을 신설하고 공작에 임명했다. 그러나 세귄은 1년만인 [[846년]]에 사망한다. 동시에 피핀 2세는 [[가스코뉴]]의 [[백작]] [[산초 2세 산시온]]에게 도움을 청했다. [[산초 2세 산시온]]은 그의 아버지 [[피핀 1세 (아키텐)|피핀 1세]]가 자신의 아버지 루트비히 경건왕을 상대로 전쟁할 때 도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카를 2세]]의 충실한 지지자가 된 산초 2세는 그의 요청을 거절한다. 한편 [[보르도]]는 [[아키텐]]의 가장 큰 도시로, [[보르도]] 지역이 대머리 [[카를 2세]]의 수중에 들어가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보르도]]는 바로 [[847년]] [[야를 오스카]]의 [[바이킹]] 군대에 의해 탈환, 회복되었다. 시민들 중에는 [[유대인]] 및 피핀 2세의 지지파 게릴라들도 있었다. 한편 피핀 2세는 이교도 해적과도 손을 잡았다. 한편 피핀은 [[과음]]과 다소 나태한 생활에 빠졌고, [[848년]] 무렵에 이르러 [[아키텐]] 귀족들 중 피핀에 대한 지지도는 줄어들었다. [[848년]] [[6월 6일]]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은 다시 자신이 아키텐 왕임을 선언하였다. 동시에 피핀 2세의 동생 [[아키텐의 샤를]]이 [[아키텐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아키텐의 샤를]]은 [[848년]] [[6월 6일]] [[오를레앙]]에서 자신이 [[아키텐]]의 [[국왕]]이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1년 안에 [[아키텐]]의 귀족들 중 상당수는 피핀 2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
 
[[보르도]]를 정복한 후 피핀과 [[바이킹]]은 [[툴루즈]] 변경[[백작]] [[셉티메니아의 기욤 2세]]를 사로잡아 다시 보르도로 돌아왔다. 피핀 일행은 기욤 등과 함께 [[셉티메니아]]로 갔다. 피핀 2세의 봉신인 프레들롱 변경백은 대머리 카를에게 투항, 툴루즈를 프랑스의 카를에게 인도했다. [[849년]] 카를은 기욤 대신 [[로엘의 프레데론]]을 [[툴루즈]] [[백작]]으로 임명하였다임명하고, 백작령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피핀 2세는 기욤을 앞세워 전쟁([[셉티메니아 전쟁]])을 일으켰다. 기욤은 스페인으로 내려가 [[바르셀로나]]를 공략, 백작 수니프리드(Sunifred)의 죽음으로 별 어려움 없이 [[바르셀로나]]에 입성, 바르셀로나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곧 카를의 지원군에 의해 패퇴하게 된다.
 
[[849년]] [[3월]] 피핀 2세는 이탈리아의 [[로타르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오히려 피핀 2세는 [[투르]] [[백작]]에 의해 체포되었다. [[851년]] [[카를 2세]]는 [[수아송]]에서 의회를 개최하고 피핀 2세의 해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아키텐]]의 귀족들은 카를 2세의 결정에 반발했다.
 
=== 체포와 투옥, 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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