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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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에는 강주(菁州)로 환원되었으며, [[983년]]([[고려 성종]] 2년) 처음으로 [[목 (행정 구역)|십이목]](十二牧)을 두었는데 이 때, 진주에 진주목(晋州牧)을 두었다.
[[조선 시대]]에는 진주를 진양(晉陽)·진강(晉江)·청주(菁州)·진산(晋山)이라고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제1차 진주성 전투]]를 통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거두게 되며, 이듬해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7만의 민관이 전몰하며, 왜군에 함락되기도 하였다.
[[1896년]]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 33년에 전국을 [[13도제|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주는 경상남도에 속해지고 도청소재지가 되어 진주군에는 관찰사가 상주하였으며, 경남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7년]] 6월에는 도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여 진주군 진주면이 되었다.
[[1925년]] [[4월 1일]] [[경상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었으며, [[1931년]] [[4월 1일]] 진주면이 진주읍으로 승격하였다.<ref>조선총독부령 제103호 ([[1930년]] [[12월 29일]])</ref> [[1939년]]에는 진주읍이 진주부로 승격되어, 시장에 해당하는 부윤을
== 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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