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동 (서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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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완 (토론 | 기여)
→‎역사와 유래: 종루가 설치되어 아침 저녁으로 시간을 알려 줌에 따라 운종가로 바뀌었고 - -> ...큰 상점 육의전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구름 같이 많다 하여 운종가(雲從街)라 불리었고.. (참고: 운종가의 從을 鐘으로 잘못 알고 쓴듯 하여 바로 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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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는 처음부터 [[조선]] 왕조의 도성의 역할을 하기 위해 계획 도시로 건설된 곳이다. 종로 또한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로였다. 조선시대의 종로는 영조척(營造尺)으로 폭 56척, 양옆의 수구(水溝)는 각각 폭 2척의 넓이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특별히 붙여진 이름이 없었으나, 종루에서조정에서 아침공인을 저녁으로받은 성문을여섯 열고군데 닫는 시간을상점인 알린데서육의전이 있어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이 왕래한다는 뜻으로‘'''운종가'''’(雲從街)라는 이름으로불리었다가나중 불리기종루가 시작했다.설치된 점점이후 시간이 지나 운종가라는지남에 이름은따라 ‘종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세종로]]<ref>조선시대 당시 육조 거리, 《주례》〈고공기〉72에 따르면 외조[外朝]</ref>가 정치적 중심 지역이었던 것에 반하여, 종로는 [[육의전]](六矣廛)을 비롯하여 많은 상점들이 분포하였던 상업지역이었다. 종로는 동서를 횡단하는 도성 내 간선 도로였으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도로변을 잠식하는 가건물 및 상점들이 늘어나 도로 폭이 점차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까지 지속되어 양품점·서점·제과점을 비롯하여 동대문 시장까지 분포하는 대형 상업 지역을 이루게 된 근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