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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중종12년) 12월 17일 세상을 떠나니 천수87세 였다. 1706년(숙종32년) 지방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安東) 길안(吉安) 묵계(黙溪)에 묵계서원(黙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10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인데 1868년(고종5년) 3월 12일 시호가 문헌(文獻)으로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4권 2책이 있다. 1732년(영조8년) 초간이 이루어졌으며, 1901년(광무5년) 중간 되었다.
 
보백당 [[김계행]]선생은 조선 전기 영남 유림에 몇 안되는 중량급 인사였다. 영남 지방의 거장 [[김종직]](金宗直)과 동갑내기로 함께 영남 유림을 이끌며 도덕과 학문으로 사귀었다. 조정으로 나아가서 성종을 보필하며 명관으로 조야에 성망이 높았다. 특히 영의정 인재(仁齋) [[성희안]](成希顔)과 교분이 두터웠다. 성희안은 숭유정책의 신진사류로서 임금이 많은 자문을 구할 만큼 학문이 깊었으며, 1506년 진성대군을 옹립, 중종반정의 거사를 성공시킨 1등 공신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보백당 김계행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내며 강직하기로 유명하여 성희안(成希顔), [[성희증]](成希曾) 형제가 경외하는 마음의 친구였다. 한편 김계행은 흔히 장동김씨로 불리는 (新)안동김씨 청음 김상헌의 조부 [[김생해]](金生海)가문의 여명기에 안동김씨의 문호를 연 중흥 시조나 다름없었다. 조선조 전기 안동김씨 초기에 가문을 이끌던 원로급 문장으로 군림하였다. 보백당은 "청백"의 표상이다. 그 기상이 푸르고 성품이 깨끗했으며 푸르기가 청옥 같고 깨끗하기가 백옥을 닮았다. 절개가 얼음과 같이 쨍쨍했다. 서예 유성룡이 "보백당은 강직한 분"이라 칭송했다. 보백당은 아들 다섯을 두었다. 맏이는 참봉, 둘째는 진사, 세째는 생원, 다섯째는 군수로 아버지가 물려준 가보 "청백"을 지키며 사랑했다. 맏딸은 상주 함창(이안) 찰방 박눌(朴訥)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다섯을 낳아 모두 문과에 급제를 시켰다. 맏아들 박거린(朴巨鱗)은 1504년(연산10)에 급제해 금산군수 사헌부장령을 지냈고, 둘째 박형린(朴亨鱗)은 1516년(중종11)에 급제해 충주목사 이조참의, 셋째 박홍린(朴洪鱗)은 1522년(중종17)에 급제해 도승지 대사헌 예조참판, 넷째 박붕린(朴鵬鱗)은 1533년(종종28중종28)에 급제해 한림, 세자시강원 설서, 다섯째 박종린(朴從鱗)은 1532년(중종27)에 급제해 이조정랑을 지내 5형제(향오린,鄕五鱗) 모두를 나라의 기둥으로 성장시켰다. 향오린(鄕五鱗)중에서 막내아들 박종린의 후손들이 문한으로 예천을 떠들석하게 했다. 문집이나 유고가 있는 선비가 약 40-50명이 나왔다. 의병장 박주대도 여기 출신이다. 둘째딸은 안동 하회 유자온(柳子溫)에게 시집을 갔다. 외증손 입암 [[유중영]](柳仲郢)을 키워 예조참의 승지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외현손 겸암 [[유운룡]](柳雲龍)과 서애 [[유성룡]](柳成龍)은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피실골에 있으며, 묘표(墓表)는 외손 영의정 서애 [[유성룡]](柳成龍)이 기(記)하고, 외현손 직장(直長) 박수근(朴守謹)이 썼다. 그 후 비석이 상하고 묻혀 11대손 김이선(金履善)이 쓰고 외후예(外後裔) 이장우(李章瑀)가 다시 써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