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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자이나교]]의 출현 이전에도 바이샬리는 [[리차비족|리차비 국]]의 수도였다. 그 시기에 바이샬리는 고대 대도시였으며 바이샬리 공화국의 수도였으며, 현재의 인도 비하르 주의 [[히말라야]] - [[갠지스강]]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ref>{{Cite web|url=http://bstdc.bih.nic.in/Vaishali.htm|title=BSTDC|website=BSTDC|accessdate=26 December 2019}}</ref><ref>[https://www.britannica.com/place/Vaishali Vaishali] – [[Encyclopædia Britannica]]</ref> 그러나, 바이샬리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비슈누 푸라나]]는 바이샬리를 다스렸다는 34명의 왕을 기록하였는데, 바이샬리의 초대 국왕 ''나바가(Nabhaga)''는 인권의 문제로 자신의 왕위를 내놓고 "나는 이제 땅을 자유롭게 경작하는 사람이 되었소. 내 땅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 되었소."라고 선언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34명 중 마지막은 [[힌두교]]의 신 라마 왕자의 아버지인 다사라타(Dasaratha)의 동기로 여겨지는 ''스마티(Sumati)''였다.
 
바이샬리는 불전문학 뿐 아니라 많은 민담에 등장하는 유명한 유녀 암바팔리가 활약했던 땅으로도 유명하다. 암바팔리는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 마누데프는 바이샬리의 연맹을 이루고 있는 저명한 리차비 가문의 유명한 왕이었는데, 그는 바이샬리에서 그녀의 춤 공연을 본 후 암바팔리를 소유하기를 원했다.<ref>{{Cite web|url=https://timesofindia.indiatimes.com/life-style/books/features/Amrapali-was-more-than-a-luscious-courtesan/articleshow/12517919.cms|title=Amrapali was more than a luscious courtesan - Times of India|website=The Times of India|accessdate=26 December 2019}}</ref> 암바팔리는 이를 거절하고 석가모니 부처에게 귀의하였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암라수([[망고]]) 정원을 기증하여 석가모니 부처와 그에게 귀의한 비구니 즉 여승들을 위한 사원으로 삼았다.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아비셰크 푸쉬카리니(Abishek Pushkarini, 즉위의 연못)라는 인공 호수가 있는데 바이샬리의 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하던 곳으로, 호수의 물을 바이샬리의 지도자로 새로 선출된 자의 머리에 부었다고 한다. 호수 인근에는 일본의 법화종 계열의 불교 종파인 닛폰잔 묘호지 대승가(日本山妙法寺大僧伽)가 지은 일본식 불교 사찰과 비슈와 샨티 스투파(세계평화탑)가 서 있다. 바이샬리에서 발견된 석가모니 부처의 유물의 작은 부분이 스투파의 기단과 차트라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