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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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0세기]]에 이르러 중앙 귀족이 분열하고 지방에서 자리 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을 세우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후삼국 시대가 발발하여 국력이 약해진 신라는 백성을 단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경순왕]] 때인 935년 [[고려]]에 스스로 복속하기로 하면서 56대 992년([[사로국]] 포함) 동안 이어진 '''신라의 종묘와 사직'''을 닫게 되었다.
진한(辰韓)과 신라에서는 왕(王)을 간(干)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 국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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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위기 ===
이와 같은 신라의 팽창은 고구려·백제 양국의 반격을 초래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신라의 발전#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이와 같은 신라의 팽창은 여·제(麗濟) 양국의 반격을 초래하였다. }}</ref> 진흥왕 이후에는 진흥왕 대에 복속했던 영토들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으며, [[선덕여왕]] (재위: 632년 ~ 647년)대인 642년에는
=== 신라의 삼국 통일 ===
{{본문|신라의 삼국 통일|나당 전쟁}}
[[676년]] [[신라]]가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실패하였고, [[648년]]([[진덕여왕]] 2년)에 신라와 당나라는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대동강]]을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합의하고 군사동맹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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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신라는 [[675년]]에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676년]] [[11월]]에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 통일을 달성하고, [[대동강]]부터 [[원산|원산만]](元山灣)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 [[말갈]] 등 [[한반도]]에 있던 나라들을 차례로
결국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북부 영토에는 30여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발해]](698년 ~ 926년)가 들어섰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또한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를 끌여들였다는 점에서
=== 통일신라의 발전: 왕권의 강화와 제도의 정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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