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종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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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반 ===
==== 출생과 책봉 ====
혜종은 [[912년]] [[나주]](羅州) 흥룡동(興龍洞)에서 [[고려태조 태조|태조왕건]](太祖) 임금과 [[장화왕후]](莊和王后)의 아들로 태어났다.<ref name="noju">{{웹 인용 |url=http://www.najuculture.or.kr/docu/html/menu300/sub03_1.asp# |제목=태조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912~945) |확인날짜=2011-10-16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14005838/http://www.najuculture.or.kr/docu/html/menu300/sub03_1.asp# |보존날짜=2013-12-14 |url-status=dead }}</ref> [[왕건]](王建)은왕건은 아들의 이름을 [[왕무|]](武)라 정하였다. [[왕건]](王建)과왕건과 오씨가 만났다는 [[나주]](羅州) 완사천(浣紗泉) 연못은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고, [[왕무|혜종]](惠宗)이혜종이 태어난 마을은 후대에 가서 임금이 태어난 마을로 전하다가 왕을 상징하는 '용'(龍) 자를 써서 지명이 흥룡동(興龍洞)이 되었다.
 
[[왕건|태조]]는왕건은 [[궁예]] 휘하에서 [[나주]]를 정벌하고 그곳에 주둔할 때, 해주 호족 [[오부순]]의 손녀이며 [[오다련]]의 딸인 오씨를 만나 혼인하였다. 첫 부인 [[신혜왕후]]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그는 [[왕건]]의왕건의 장자였다. 그러나 서남해안의 호족인 [[나주]]의나주의 오씨 집안 세력 견훤의 금성 침략 때에 손실을 입어 다른 호족들에 비교하여 병력이 약해져 이러한 출신 배경으로 지위가 불안하였으며, [[왕건]]은왕건은 바로 원자로 책봉했다가 [[921년]] 그를 [[왕무|태자 무]]로태자로 삼아 국본으로 정한다. 그러나 외가의 가세가 약하여 권력 기반이 약했던 [[왕무|혜종]]은혜종은 후에 왕위쟁탈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처음부터 외가의 가세가 약했던건약했던 건 아니고, 견훤의 나주 탈환 작전으로 인해 가문의 기반을 잃어 버리게 된 후 가세가 약해진다. 전라도 나주 지역은 훗날 거란과의 전쟁에서 현종이 몽진시 목숨을 의탁할 정도로 고려 왕실에서 믿는 구석이기도 했다.
 
[[태조 왕건]]이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왕건|태조 왕건]]에왕위에 오른 후 [[왕무|태자태자가 무]]가7세 7세때때, [[태조 왕건]]은왕건은 그가 보위에 오를 덕이 있음을 알았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상자에 자황포를 담아 [[장화왕후]]에게 보냈다. 왕후가 이를 대광 [[박술희]](大匡 朴述熙)에게 보여<ref name="noju"/>주었다.
 
==== [[후백제]]와의 교전 참여 ====
[[고려 태조|태조]]의태조의 뜻을 알아차린 [[박술희]]는 여론을 조성하고 [[고려 태조|태조]]에게태조에게 간청하여 [[921년]] 드디어 [[왕무|태자 무]]로무로 책봉되었다.<ref name="noju"/>
 
[[921년]](태조 4년) 박술희 등의 도움으로 태자로 책봉된 뒤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쳐서 공을 세웠다.
 
[[943년]] [[고려 태조|태조]]가태조가 죽자 즉위하였으나, 이복동생인 [[고려 정종 (3대)|왕요]](王堯)와 [[고려 광종|왕소]](王昭)가 왕위를 엿보았다. 그들은 [[고려 태조|태조]]의태조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소생이며 [[충주]] 지역 호족이었던 [[유긍달]](劉兢達)의 외손으로, [[충주 유씨]]는 혼인을 통해 여러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 즉위 ===
==== 즉위 초반 ====
[[944년]] 광평시랑 [[한현규 (고려)|한현규]]와 예빈경 [[김염 (고려)|김염]]을 진(晋)나라에 보내어 왕위를 계승한 것을 알리고 [[거란거란족]]족을 쳐부순 것을 하례하였다.
 
이복 동생 [[고려 정종 (3대)|왕요]]와 [[왕소]]가 왕위에 도전하고 있음을 눈치챈 [[왕규 (함규)|왕규]](王規)는 945년([[왕무|혜종]] 2) 이 사실을 알렸으나 [[왕무|혜종]]은혜종은 둘을 벌하지 않았다. [[왕무|혜종]]이혜종이 이 둘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불만을 품은 [[왕규]]는왕규는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다.
[[945년]] 후진에서 광록경 범광정과 태자선마 장계응을 파견, 그에게 지절 현도주도독 상주국충 태의군사 고려국왕(持節玄度主都督上柱國充太義軍使高麗國王)으로 책봉하는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그해 혜종을 지지하던 [[고려 태조|태조]]의 최측근 [[박술희]]가 [[왕규 (함규)|왕규]] 일파와 [[고려 정종 (3대)|왕제 요]]왕요 일파에 의해 역모의 누명을 쓰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살해된다.
 
==== [[왕규 (함규)|왕규]] 역모설 ====
{{참고|왕규의 난}}
[[왕규 (함규)|왕규]]는 당시 [[왕무|혜종]]에게도혜종에게도 후궁으로 자신의 딸 [[후광주원부인|후광주원부인 왕씨]](後廣州院夫人王氏)를 시집보내 [[고려태조와 태조|태조]]와 [[왕무|혜종]], 양인의 국구의 위치에 있었다. 이 때문에 광주원군 추대설은 후대에 [[고려 정종 (3대)|왕요왕제 요]] 때나 [[왕소|광종]] 때에 날조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왕규왕규는 (함규)|왕규]]는 [[왕무|혜종]]에게혜종에게 왕제인 [[고려 정종왕요와 왕소(3대광종)|왕요]]와 [[왕소]]가 제위를 노리는 것 같으니 유의하라는 고변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왕무|혜종]]은혜종은 동생들을 시험하였다 하며 자신의 딸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을 [[고려 광종|광종]]의광종의 후궁으로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무|혜종]]은혜종은 [[고려정종과 정종 (3대)|정종]]과 [[왕소]]를왕소를 처벌하지는 않았다.
 
왕권다툼 속에서 혜종은 명확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945년]] 병으로 죽었다.
 
=== 사후 ===
이어 이복동생 [[고려 정종 (3대)|정종]](王堯)이 왕위에 올랐는데, 혜종의 유언에 따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사료에는 스스로 군신의 추대를 받아 위에 오른 것으로 나와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혜종이 병으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젊어서부터 기질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지혜와 용맹이 뛰어났다고 한다. 혜종의 능은 [[개성]](開城)의 [[순릉 (고려 혜종)|순릉]](順陵)이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