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왜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시각 편집 m 모바일 웹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토착왜구'''(土着倭寇)는 자생적인 친일 부역자를 뜻하는 사어였다가 최근들어 다시 활성화된 표현이다.<ref>{{웹 인용|url=http://news.mt.co.kr/mtview.php?no=2019050213242732538|제목="일본보다 '일빠'가 더 싫어요" - 머니투데이 뉴스|날짜=2019-05-05|언어=ko|확인날짜=2019-05-07}}</ref>
조선의 가장 위대한 순왜장군 사야가...
 
 
사야가는 일본 전국시대 통일을 거의 이룬 오다노부나가 수하 토요토미히데요시의 조선정벌 임진왜란때 카토기요마사 휘하의 제1 선봉장으로 참전전한 백전백승의 20대 청년장수로 수하 3천명을 이끌고 조선에 투항하여 곽재우의 신출기묘한 전략을 이끌었으며 조총을 제작을 조기에 시작해 전쟁을 조기에 우세하게 이끌었던 순왜장군 한국명 김충선이다.
 
.선조대왕과 패장 이순신장군
 
언어는 수많은 민족과 하물며 동물들도 사용한다
 
천지인 단순표기법으로 쉽게 쓴 장점은 있어 학자들의 창제에 도움을 준 왕이라고 과하게 칭송받는
 
세종대왕보다 임금 사적 비용인 내탕금으로 동양최고의 의서인 동의보감을 제작케 하고 수많은 인재들을 발굴 활용하며 외교를 잘하여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선조대왕 조선최고의 대왕이다.
 
그리고 조선최고의 패장 이순신..
 
임진왜란을 그렇게 막고자했던 토요도미히데요시의 가신이자 왜병 제일 선봉장 고니시유키나카..
 
조금만 눈치가 있고 지략이 있었어도 수많은 인명을 잃는 아픔을 피할수
 
있었으려만. 정유재란때 몰려오는 왜적 섬멸의 어명을 거역한 이순신장군의 부전의항거로 조선의 수많은 인명은 희생되었다.
 
제1 진주성 전투에서 패한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진주성 정벌을 명했고 , 왜군 선봉장 고니시는 총병력을 동원해 진주성을 잠깐 점령하고 물러 날 테니 성을 비워라고 조선에 통고 했고 ,
 
사야가의 충고를 들은 곽재우 및 주요관군들이 퇴진하였으나 일부관군과 김천일등의 의병이 진주성이 함락되면 전라도 곡창지대가 뚫린다고 수만명의 성민을 모아 결사항전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왜의 선봉장 고니시는 약속데로 성을 점령한 후 전라 곡창지대로 가지않고 약속대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순신장군
 
선조와와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던 왜의 선봉장이자
 
추후 로마교황청이 인정한 일본 제1호 성인Saint인 고니시 유키나와는 정유재란때 정적인 카도기요마사 부대가 부신 앞바다에 오는 시간과 규모를 알려주고 우세한 조선해군으로 섬멸 키로 했으나 이순신장군이 어명을 거부하며 기회를 놓쳐 역사의 죄인이 되어 백의종군 하게 되었다.
 
이를 만화하기 위해 명량해전 즉 배설장군이 퇴각보유한 동양최고의 전함 판옥선 ㅡ 이는 세계 대양휘저은 명나라 정화장군시대의 최고 전함을 모델로 만든 1당백의 동양 최고의 전함 ㅡ 12척으로 300정도의 왜 수송선을 물리치고 일본수군이 공격해 올까봐 두려워서 서해 아산 근처로 피시했던 것이 정사 아닌가? 전라도 곡창지대를 지켰다고, ? 그들은 임진 정유재란 내내 본토에서 군량미를 수송해 와서 자체 보급하고 조선 백성에게 나눠줬다..
 
도요토미의 주군 오다노부나가는 저수지 보등을 활용한 치수정책으로 양곡생산이 몇배로 늘어나서 그재원으로 일본을 통일하고 그 이후 도요토미가 조선침략을 나선 힘이 중국 통일 진시황제 처럼 왜의 양곡 생산력증대에 있었다.
 
언제까지 분열역사의식으로 살것인가?
 
 
 
 
 
 
 
 
 
 
 
 
 
 
 
<br />
 
== 유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