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스 B. 카이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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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볼튼 카이저'''(Laurence Bolton Keiser, [[1895년]] [[6월 1일]] ~ [[1969년]] [[8월 20일]])는 미국의 군인이다. [[제1차 세계대전,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둘다 참전한 [[미국]]의 [[장교]]이며 [[한국 전쟁]] 참전하였다.초기 육군동안 소장으로[[제2보병사단 예편하였다(미국)|제2보병사단]]을 지휘하였다.
 
== 초기 생애 ==
로렌스 볼튼 카이저는 [[1895년]] [[6월 1일]] 미국[[펜실베이니아주]]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에서[[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웨스트[[미국 포인트를육군사관학교]]를 [[1917년]] 졸업했다. 졸업하였으며, 동기로는 [[J. 로턴 콜린스]], [[매슈 리지웨이]], [[마크 웨인 클라크]]가 있었다.<ref name="Blair201">Blair, 1987, p. 201{{Snd}}202</ref>
 
== 군사 경력 ==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미국 원정군]]과 함께 [[프랑스]]로 급파된 카이저는 빠르게 일시적 [[대위]]로 진급되었고, 제5보병사단의 부대 [[제6보병연대 (미국)|제6보병연대]]의 제1대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서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서부 전선]]에 활동들로 인하여 [[은성훈장]]이 수여되었다.
 
== 양대전 사이 ==
[[1920년]] [[3월]]부터 [[1922년]] [[6월]]까지 [[중국]] [[톈진]]에서 [[제15보병사단]]과 함께 주둔하였다. [[1923년]] 그는 포트베닝에서 보병 중대 사관 과정으로부터 졸업하였다. 그러고나서 그는 포트샘휴스턴에 있는 제23보병연대에서 대부대 사령관을 지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카이저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임 강사였다.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자신의 지위 후에 카이저는 제9보병사단에서 중대 사령관으로서 포트샘휴스턴으로 돌아왔다. [[1932년]] 자신이 포트베닝에서 보병 사관 상급 과정을 완료한 후에 포트샘휴스턴으로 [[예비역]]의 부대들에 조언자와 교사로서 돌아왔다.
 
[[1939년]] 카이저는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를 졸업한 후, 선임 참모와 그러고나서 제29보병연대의 사령관으로서 포트베닝으로 지정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
[[1942년]] [[4월]] 카이저는 포트맥퍼슨에서 [[제3군단 (미국)|제3군단]]의 참모 총장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그러고나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종군들이 있는 동안 제4군단의 참모 총장을 지냈다. [[1944년]] [[1월]] 그는 준장으로 진급되었고, 포트샘휴스턴에서 [[제4군 (미국)|제4군]]의 참모 총장으로 지정되었다. [[1948년]] 중국으로 돌아간 그는 이번에 [[중국 국민당]] 정부의 미국 군사 조언 단체의 일부로서였다.
 
== 한국 전쟁 ==
[[1948년]] [[11월]] 카이저는 [[제2보병사단 (미국)|제2보병사단]]의 보조 사단 사령관으로 만들어졌다. [[1950년]] 그의 육군사관학교 동기 조 콜린스는 그에게 [[소장 (계급)|소장]]으로 진급과 함께 사단의 지휘를 주었다. [[한국 전쟁]]의 발발에 이어 제2사단은 미국 본토로부터 [[한국]]에 도착하는 데 첫 [[미국 육군]] 부대였다.
 
[[8월]]부터 [[9월]]까지 사단은 [[부산광역시|부산]]에 상륙하고, [[조선인민군]] 제4부대가 [[낙동강]]을 건너고 난 후에 그 전선을 수복하는 데 당시 분투하던 제24보병사단을 보조하러 낙동 벌지로 이동하였다.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대공세]]를 발포할 때 4개의 사단들은 제2부대를 향하였다. 적군과 첫 접촉에 제2보병사단의 어떤 부대들은 잘 싸우지 못하고 카이저는 [[제8군 (미국)|제8군]]의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 (계급)|중장]]에 의하여 직면할 때 자신의 사단의 상황의 상식 부족을 표명하였다. 카이저는 뛰어난 사단 사령관을 위하여 약간 너무 늙은 것으로 어떤 사관들에 의하여 이미 숙고되었다.
 
제2사단은 [[부산 교두보 전투]]로부터 포위 돌파에 연루되어 제25보병사단과 함께 [[군산시|군산]]으로 향하여 북서부로 밀고 나갔다. 사단은 [[조선인민공화국|북한]]으로 잘 전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화인민공화국 국경]] 가까이 갔다.
 
[[1950년]] [[11월]] 후순에 큰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 전투]]로 알려진 전투에서 [[유엔군]]에 공격을 발포하였다. 제2사단은 당시 압록강으로 밀고 나갔던 [[제9군단 (미국)|제9군단]]의 오른쪽 측면에 전진해왔고, 왼쪽 측면에 제25보병사단과 [[군우동|군우리]]의 북부에 위치하였다. 신속한 1주일에 걸친 공격에서 제2사단이 오른쪽에 드러내어 포위 운동의 정면 운동에 맞서면서 제8군을 포위하는 데 위협하였다. 제15보병사단은 [[안주시|안주]]로 철수할 수 있었으나 카이저는 따라가는 데 [[존 B. 콜터]] 소장으로부터 허용을 획득할 수 없었다. 제2사단은 결국적으로 중단되었고, [[순천시 (평안남도)|순천]]에서 무난으로 중공군을 통하여 그 방향으로 싸우는 데 강요되었다.
 
제2사단이 대략 4,000명의 군사를 잃은 청천강 전투에 이어 카이저는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제8군의 참모 총장 레번 C. 앨린 소장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지휘에 면제되었고, 전쟁에서 중공군의 개입에 이어 유엔군에 의하여 겪어진 후진들로 자신이 희생자로 만들어진 것 같이 느꼈어도 아마 건강적 이유로 [[로버트 B. 매클러]] 소장과 대체되었다.
 
== 이후의 세월 ==
[[1951년]] [[2월]] 미국으로 귀국한 카이저는 [[해리스버그]]와 허쉬 근처에 있는 인디언타운 협곡 군사 보류 보병 기초 훈련소에서 제5보병사단의 지휘를 취하였다. [[1953년]] 군에서 퇴직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였다. [[1969년]] [[10월 20일]] 카이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망하여 웨스트포인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 각주 ==
줄 47 ⟶ 75:
{{한국 전쟁 지휘관}}
{{전거 통제}}
 
{{기본정렬:카이저, 로렌스}}
 
줄 56 ⟶ 85:
[[분류:미국 버지니아 종합군사학원 동문]]
[[분류:미국 육군보병학교 동문]]
[[분류: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분류: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분류:미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
[[분류:미국 육군 소장]]
[[분류:필라델피아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