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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영토와 인구는 크게 늘고, 경제적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신라와 [[당나라|당]]은 우호관계를 회복했고 상인, 승려, 유학생들은 활발히 왕래했다. 무역도 활발해져서 신라는 [[당나라|당]]에 금·은 세공품, 인삼 등을 수출하고, 서적, 도자기, 비단, 옷, 공예품 등을 수입했다. 또한 [[비단길]]과 해상을 통해 서역의 문물과 상인들이 신라에 오기도 했다.
 
신라의 주요 항구로는 울산항과 [[당항성]](경기도 화성)이 있었으며, 이곳을 통해 서역과 동남아시아의 물품들이 들어왔다. 9세기 초 신라의 장군 [[장보고]]는 [[청해진]](전라남도 완도)이라는 해적소탕 기지이자 무역거점을 설치하고 중국 및 일본과의 교역 거점을 마련했다.<ref>필리핀 재외한국문화원 - 역사 - '남북국 시대:통일신라와[[통일신라]]와 [[발해]]'편</ref>
 
[[신문왕]]은 토지 제도를 바꾸어 식읍을 제한하고 녹읍도[[녹읍]]도 폐지하였으며, 백성에게 정전을[[정전]]을 지급하였다. 아울러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구휼]]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런 조치는 귀족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또한 조세는[[조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를 수취하여 통일 이전보다 완화하였다. 공물은[[공물]]은 촌락 단위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요역]]으로 이루어졌으며,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신라는 촌락의 토지 크기, 인구 수, 소와 말의 수, 토산물 등을 파악하는 문서를 만들고, [[조세]], [[공물]], [[부역]] 등을 거두었으며, 변동 사항을 조사하여 3년마다 문서를 다시 작성하였다.<ref>[[신라장적]](新羅帳籍)</ref>
 
== 사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