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클레멘스 7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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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의 적대자들이 혼란한 정국을 틈타 권력을 장악하고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교황의 친척들)을 축출하였다. 이듬해 6월 전쟁 당사국들이 모여 바르셀로나 평화조약에 서명하였다. 교황령은 몇몇 도시를 되찾았으며, 카를 5세는 메디치 일족이 피렌체 공화국을 지배하는 것과 군사적 원조를 통해 피란체 탈환을 돕기로 했다. 1530년 2월 24일 볼로냐(Bologna)에서 카를 5세를 위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대관식<ref>교황에 의해 치루어진 마지막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대관식으로 알려져 있다.</ref>을 거행하며 교황과 황제간에 화해의 이정표를 찍었다.
 
1530년 11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피렌체는 함락되었으며,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의 사생아인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ref>교황의 사생아가 아니라 조카라는 설도 있다. 1536년에 알레산드로는 황제 카를 5세의 사생아 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타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1537년에 "로렌자치오"(Lorenzaccio, 나쁜 로렌초)라는 별칭을 지닌 그의 먼 사촌 로렌치노 데 메디치에게 암살당했다</ref>를 그곳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뜻에 부합하는 정책을 따랐다. 이는 카를 5세가 독일에서 [[루터파]]에 대해 강경한 행동을 취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공의회를 열자는 카를 5세의 요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1533년 자신의 조카 [[카트린 드 메디시스|카트린]]과 프랑수아 1세의 차남 앙리의 정략결혼을 성사시켰다.<ref>카트린이 프랑스 왕가로 시집가게 된 것은 이탈리아를 흠모했던 프랑수아 1세의 의지가 상당수 반영되었다는 설이 있다. 카트린과 앙리의 결혼을 계획하자 프랑스 귀족들의 반발은 심했다. 이 때문에 프랑수아 1세는 건강한 왕태자 프랑수아를 제치고 앙리가 왕이 될 리는 없으며 따라서 카트린은 어디까지나 오를레앙 공작 부인일 뿐 왕비가 되지는 못한다고 대신들을 설득했다. 프랑수아 1세는 이 결혼을 통해서 차남 앙리에게앙리가 밀라노 공작령을 맡을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클레멘스 7세는 그럴 의향이 전혀 없었다. 대부호로 알려진 메디치 가문이었으나, 카트린이 결혼할 당시 파산에 가까운 상태로, 그녀가 혼수로 가져간 보석들은 메디치의 소유가 아닌 클레멘스 7세가 빼돌린 교황청의 소유였으며, 클레멘스 7세는 카트린의 지참금으로 약속된 금액을 끝내 지불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 당시 카트린이 데려간 이탈리아의 요리사들로 인해 미식으로 이름난 프랑스 요리의 시작시작이 되었다.</ref>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교황은 직접 프랑스를 방문하였고 프랑수와 1세와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교황은 이 결혼을 통하여 코냑동맹전쟁 이후 이탈리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황제 카를 5세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1536년에 프랑수아 1세의 장남이 급사하는 바람에 그의 조카 [[카트린 드 메디시스|카트린]]은 훗날 1547년에 프랑스 앙리 2세의 왕비가 되었다.